봄 소풍을 마주하며 생각한 ‘교육’의 의미
[ 현장칼럼 ]
작성 : 2024년 05월 17일(금) 08:00 가+가-
5월이다. YWCA 키다리학교는 슬슬 봄 소풍을 나선다. 3월 신입생 모집 후, 학생들 사이의 어색함도 조금 누그러지고,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마음껏 봄을 누리기에 좋은 날이 된 것이다. 지역 YWCA의 키다리학교 소식을 들으며 "아, 애들은 진짜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멈칫했다. '애들...?' 2024년의 5월, 키다리학교의 봄 소풍이 질문을 건넸다. "내가 무심코 쓰는 '애들'이라는 말은 평등하고 교육적이며 적절한 걸까?"

키다리학교는 '키우자 Y다운 리더'라는 뜻으로 한국YWCA의 토요대안학교이다. 주입식 공교육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기회들을 빼앗긴 청소년들에게 그 기회를 다시금 선물하고자 세워졌다.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 주체성이 교육의 본 의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설립 목표에 따라 키다리학교는 자치와 실천을 강조했다. 그래서 키다리학교의 교육 과정은 청소년이 직접 결정한다. 교육 장소도 그렇다. 일정과 내용, 세부 사항까지, 함께 모여 맞댄 머리에서부터 그 모든 것이 시작된다.

키다리학교가 키다리학교답지 않은 것. 그것만큼 큰 위기가 어디 있을까? 그런 키다리학교는 코로나19로 인해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미 학교라는 틀은 존재하는데 청소년의 물리적 참여도가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실무활동가의 역할이 커졌다. 실무자끼리 만날 기회도 줄어들다 보니 실무자들도 자신들의 상황을 살필 기회가 부족해졌다.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계획하는 일이 줄어들고, 실무자의 영역이 늘어만 갔다. 어느새 키다리학교에는 실무자들에 의해 잘 짜여진 활동형 프로그램만 가득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얼마 안가 본래의 정신을 찾아 나섰다. 청소년들은 남이 차려준 밥상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기반으로 키다리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다시금 노력 중이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간다'는 키다리학교의 운영 방침처럼 청소년은 주체로서 이해되고 있는가? 우리는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서로를 주체로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우리는 그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런 다양한 질문을 하며 우리는 교육의 본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러한 노력은 꽤 긍정적인 결과물들을 만나게 한다. 봄 소풍이 그 대표적인 예다. 부산 영도바다 플로깅, 쓰레기 없이 떠나는 동네 한바퀴. 배제된 이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맞댄 머리에서 우리는 각자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깨닫는다. 플로깅이 왜 필요하며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며 세상을 배우기도 한다. 논의 과정을 통해선 기획력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배운다. 하나를 짜도 함께 짜야 제 맛이며, 함께 할 땐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다시금 교육의 본질에 대해 확신한다. 주입이 아닌 주체성,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어린 사람은 아랫 사람이야'라는 잘못된 생각이나 그런 사고를 녹여낸 '애들'과 같은 표현이 아닌, 한 존재의 반짝임을 향한 존중과 신뢰라는 사실도 다시금 떠올린다.

교육을 뜻하는 영어표현 'Education'의 어원을 살펴보자면, 'E-는 밖으로', 'duce+ate'는 '이끌다'는 뜻으로, '교육한다'는 본래 '자기 안에 존재하는 능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발현하는 것이다. 확장하는 것이다. 발현을 위해선 자기 경험과 결정이 중요하다. 결국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엔 위계가 없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기 때문에, 또한 서로의 반짝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교육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교육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위계적·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반짝임을 존중하고 서로가 성장할 기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안의 반짝임으로 다른 누군가의 반짝임을 비춰줄 사람이다. 그런 의미를 숙고해 보자면, 청소년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언제나 주체다. 물론 어른도 그렇다. 전 생애에 걸쳐 진행되는 교육에서는 누구나 마주한 서로에게 끊임없이 배우며 반짝이는 주체이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3-15)"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환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로부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교육은 내 안의 반짝임을 꺼내 확장하는 일. 언제나 질문하며 함께 한 이들의 생각이 궁금했던 예수 그리스도. 교육의 기반엔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존중과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정체성, 모두가 동등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의 시작이었다.

봄 소풍을 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나눴다. '애'와 '어른'의 구분은 없었다. 함께하는 '서로'만 있었다. 함께 나누고 크게 웃었다. 예수 따라가는 이 길에선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서로가 귀했고 동등하며, 서로에게 배우고 성장했다.



이은혜 간사 / 한국YWCA연합회 시민운동국 청소년운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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