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2월 16일 오후 2시 영선정예배당에서 모인 제9회(연합 총회 제4회) 총회에서 안갑수(1900~1933)가 회장에 선출되고, 한동년은 부회장으로 함께 활동했다. 안갑수는 주기철(1897-1944) 목사의 사모였다. 김해읍교회에 출석하던 안갑수는 1917년 주기철 목사와 결혼했다. 주 목사와의 사이에 5남(영진, 영만, 영묵, 영해, 광조) 1녀(영덕)를 두었다.
근대여성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개화된 가정 출신인 안갑수는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예민하고 사려 깊은 여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갑수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인해 1933년 5월 33살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다. 안갑수의 장례식은 5월 19일 교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그녀는 마산 무악산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으로 힘들었지만, 주기철 목사는 장례식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경남노회 여전도연합회 회원들에게 보낸 1934년 2월 20일자 감사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안갑수를 추모하고, 연합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근계. 성신의 은혜가 귀 총회 석상에 충만하시고 귀회의 사업이 날로 융성하시기를 기도하나이다. 보고 금번 귀 총회가 통영에서 개최됨을 듣고 감사와 감개를 금할 수 없는 교생은 직접 나아가 총회 석상에서 사례를 드려야 마땅할 터이오나 방금 경남성경학원 교수로 몸을 매고 있어 뜻같이 못하옵고 엎드려 몇 마디 글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으시옵소서.
거년 오월 교생의 내처 안갑수의 별세 당시에 귀회에서 주신 바 사랑과 위로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이 감사를 드리나이다. 분주하신 중에 임원 여러분이 장식에 왕림하여 주셨고 간곡하신 조문을 보내어 주셨사오며 특히 갑수의 무덤 앞에 세워주신 기념비석은 이후 공중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까지 귀회의 사랑을 말하고 있겠습니다.
교생으로서 귀회의 그 두터운 사랑을 보답할 길이 없사옵고 다만 갑수가 생전에 귀회를 위하여 매일 두고도 몇 번씩이나 기도하던 그 기도를 이어서 이 작은 몸이 세상에 있는 동안까지 잊지 않고 기도하여 드리기로 결심한 것뿐입니다. 끝으로 금번에 모이신 귀 총대 여러분의 평강을 비옵고 이만 줄이나이다. 주 1934년 2월 2일. 교생 주기철. 경남부인전도총회 귀중."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안갑수는 여전도회연합회를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의 사모이고, 여섯 자녀의 어머니였으며, 부산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뿌리를 내리는 데 헌신한 근대여성 안갑수는 비록 33살의 젊은 나이에 잠들었지만, 그녀의 삶과 신앙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자녀들, 그리고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역사에 소중하게 남아있다.
# 1928년 설립 10주년 기념
1927년 2월 제9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28년 제10회 총회에서 여전도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로 결의하고, 향후 후원회원은 특별회원으로, 그리고 지회원은 보통회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다.
1928년 3월 6일 오전 10시 제10회 총회가 초량예배당에서 모여, 여전도회 총회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10주년 기념총회에서 회장 안갑수, 부회장 한동년, 서기 이옥경, 부서기 문복숙, 회계 이계진, 부회계 이명시가 피선됐다.
한편 경남부인전도회가 창립 10주년을 기념한 1928년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인전도회가 창립된 해이다. 부인전도회는 1921년 발기 총회 후, 총회에 설립 허가를 신청햇다. 이후 1928년 창립총회로 모인 것이다.
여전도회 규칙의 목적은 '회원의 기도와 선교에 대한 정신을 영적으로 함양시키며 교회의 아동과 여자들에게 선교정신을 조장시키며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지도 하에서 내외지 전도사 업을 찬조하기로 함'이었다.
1928년 9월 7일 대구 신정교회에서 조선예수교 장로회 여전도총회의 창립 총회가 11개 지역 연합회(함북 황해 경북 평북 경안 평양 평서 함남 경기 전북 전남)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