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선교사의 부끄러운 고백, 선교의 실패들
[ 땅끝편지 ]
작성 : 2024년 07월 09일(화) 01:02 가+가-
카자흐스탄 방승수 선교사 ②
하나님께서는 필자를 청주성서신학원에서 4년 6개월 동안 전임 교무과장으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후 선교지에서의 신학교 사역을 위해 선교지로 보내셨다. 덕분에 선교지에서 어렵지 않게 신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선교지에서 시간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선교'를 망각할 때가 있다. 내 생각이 앞서고 욕심이 앞선다. 뭔가를 보여 주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동기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가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선교지에 2004년 '류보비(사랑) 교회'를 개척했다. 300평 대지에 50~6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실과 모든 기자재, 악기까지 구비했다. 부족함 없이 교회를 개척했고, 담임 전도사 1명과 신학생 2명이 협력했다. 열정적인 사역으로 개척 몇 개월만에 70명을 넘어섰다. 청년 중심의 활동적인 교회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성장일 뿐이었다. 겨울에 보일러의 문제가 생겨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선교사님! 교회 보일러가 터졌으니 고쳐 주세요." "아니 너희 교회인데 너희들이 고쳐야지!" "아니에요 선교사님! 선교사님이 세워 주셨으니 선교사님이 고쳐 주셔야죠!" 건물 구입해서 부족함 없도록 예배실 꾸며주고 비품도 완벽하게 구비해 주었더니, 자신의 교회로 생각하지 않고 선교사의 교회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선교 방식을 복습하면서 나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척 초기부터 자립을 목표로 개척해야 했었다. 완벽하게 갖추어 주면 개척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부끄럽지만 나의 선교 첫 실패다.

신학교 사역과 더불어 카자흐스탄에 기독대학 설립을 위해 기도했다. 교육센터로 시작해 차후 기독대학이 되기에 합당한 건물을 찾던 중 쉼켄트(Shymkent) 외곽 타사이(Tassy)라는 지역에 구소련시절 농업전문대학 연구소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 대지 3300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에 강의실 20개로 기도하던 그대로였다. 또 주변 약 3000평 정도의 공터가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13만 불 가격을 절충하여 8만 불에 구입하고자 했으나 수중엔 500불밖에 없었다. 일단 계약금을 걸고 한 달 안에 잔금을 해결해야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생각하고 밀어붙였다. 결국 그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곧바로 건물 수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기독교센터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의 무슬림들이 일부러 불을 낸 것이다. 그리고는 벽에 아랍어로 '우리는 알라만을 찬양한다'라고 흔적을 남겨 놓았다. 경찰에 신고하여 특공경찰들이 밤낮 경비를 섰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방화를 위해 침입한 범인이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용서해 주라는 마음과 재산적 피해가 막중하니 현행범으로 구치소에 보내라는 마음 갈래에서 고민이 됐다. 결국 용서하는 것이 선교의 길을 여는 방법일 것 같았다. 곧바로 지역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어떤 방식으로 교육센터를 할 것인가를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기도하던 기독대학의 초석이 되는 교육센터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구소련시절 교육기관으로부터 사용하던 모든 건물을 회수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카자흐스탄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는 시기였기에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교육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방정부에 헐값에 넘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교육센터를 시작도 못 해보고 결국엔 매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방승수 선교사 /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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