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 목양칼럼 ]
작성 : 2024년 08월 21일(수) 13:48 가+가-
신대원에 입학해 선지동산에서 경건과 학문을 훈련한 지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간다. 목회자로서 늘 마음에 품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나는 사명의 길을 걸으며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가?"

1974년, 중국 산시성의 중심도시인 서안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그해 3월 29일, 외곽 시골 마을에 살던 한 청년이 물을 얻기 위해 동료 다섯 명과 함께 우물을 파고 있었다. 곡괭이로 한참 땅을 파는데 갑자기 쨍하는 소리가 들렸다. 땅속에서 도자기 파편으로 보이는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2000여 년 동안 묻혀 있었던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병마용의 '용'은 허수아비라는 뜻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모양을 한 흙 인형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34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주전 246년부터 서안 인근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면서 대규모의 병마용을 함께 묻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규모를 보면, 병사용 8000여 점, 마용 500여 점, 전차 100여 점 등에 달한다. 아직 훨씬 더 많은 다양한 유물들이 땅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라 칭한 진시황은 병마용으로 지하 군대를 만들어서 죽어서도 영원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군대 역시 진시황을 지켜주거나 진나라의 국운 쇠퇴를 막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 지 4년 만인 주전 206년, 진나라는 폭정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진시황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정치적 영웅이자 독재적 폭군의 일면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 인물이다(진시황 평전/張分田)."

오래 전, 중국을 대표하는 상하이의 한인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의 일이다. 그 교회는 수천 명의 교우가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였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여러 선교팀을 구성하여 중국 곳곳으로 내보냈다. 필자도 그중의 한 팀을 인솔했는데, 중국 장춘에서 출발하여 길림성 연변 자치주를 거쳐 백두산까지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연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용정시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약연 목사가 조성한 '명동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해외 최초의 한인 공동체로서,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라는 뜻의 명동(明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김약연 목사는 교육을 통한 개혁과 기독교 정신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요 희망임을 깨닫고,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설립하여 민족의 등불을 이어갔다.

필자는 선교팀과 함께 마을 초입에 보존된 명동교회당을 방문하였다. 예배당 내부의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고, 전면 중앙에 강대상과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몇몇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나무판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을 둘러보면서 김약연 목사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특별히 그가 남긴 한 문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그때 받은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이 꿈꾸는 소망 중의 하나는 야곱처럼, 임종 직전에 자손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지나온 시간을 회고하며 축복의 유언을 남기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사람은 질병으로 혹은 사고로 무의식중에 생을 마감한다. 근사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만, 죽음은 매정하게도 그 기회를 잘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은 평소의 행동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는 가장 소중한 유언이 될 것이다. 한 선각자의 깨달음이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어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김동찬 목사 / 광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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