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해야 되지요"
[ 한국교회인물열전 ]
작성 : 2021년 03월 16일(화) 11:04 가+가-
1. 선비목사 이원영
일제의 모진 핍박을 견뎌내야 했던 한국교회. 그러나 일제에 굴복하며 결의했던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역사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사참배 결의의 아픈 역사를 되돌리는 일에 앞장섰던 선비목사 봉경 이원영. 불의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무너진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앞장섰던 그의 삶은 오늘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삶을 바쳤던 그의 여정을 되돌아보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을 결정하게 된 이유에는 오늘날 길을 잃고 떠내려가는 돛단배와 같은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정 한국교회를 회복시킬 신앙의 사표로 이원영 목사를 떠 올렸는지도 모른다. 흔히 이원영 목사를 '선비목사'라고 부른다. 봉경 연구의 권위자인 장신대 임희국 명예교수는 그의 고향이 선비들의 고장이기도 했지만 그가 살아온 삶이 선비와 닮았기에 '선비목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비'라는 한 단어로 그가 가졌던 인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리라.

이원영 목사 기념비와 안동서부교회

이른 봄 소식을 알리듯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도착한 곳은 안동서부교회.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임희국 교수를 만나 이번 여정에 함께 동행해준 것은 행운이었다. 이원영 목사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대 목사로 부임한 안동서부교회는 1924년 안기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1952년 안동시 금곡동에 화감암으로 예배당을 준공한 후 2006년 태화동으로 이전, 현 예배당 건물을 신축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이원영 목사 기념비'가 교회 마당 한 켠에 자리하고 있어 조금이나마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기념비에는 한경직 목사가 쓴 시가 새겨져 있어 찾는 이들의 감동을 더해줬다. 그리곤 불현듯 이원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의 관계가 궁금했다.

"1954년 제39회 총회 당시, 한경직 목사님이 총회장을 하실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신과 기장이 분열했고 또한 계속 교단 분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런 어수선할 시기에 리더십을 가지고 교단을 통합시킬 인물로 이원영 목사를 언급하며 그를 총회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이원영 목사는 총회장을 마치고 4년 후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한 목사님이 이 시를 쓰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임 교수는 두 분의 관계를 이렇게 소개했다.

"훌륭한 가문 / 고귀한 명성 / 영광스러운 성직 / 실로 값진 것을 한몸에 지닌 /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셨다 / 그 독실한 믿음 / 고결한 인격 / 온유 겸손한 성품 / 충성된 하나님의 종 /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 한경직 목사." 기념비에는 봉경에 대한 한 목사의 존경심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원영 목사가 안기교회에 부임하고 해방 후에 서부교회로 재건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성경에 근거한 신앙인의 올곧음이었다. 8.15 광복과 함께 교회를 재건할 당시, 이원영 목사는 미군정청으로부터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던 적산 건물을 구입해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임 교수는 이원영 목사에게는 두가지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가지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 순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을 포용한 모습이었다. 괘심하기도 하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품어줬다는 것. 그러면서도 다른 한 측면에선 그의 단호한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해방 후, 한번은 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들이 찾아와 신사참배한 교회는 때가 묻은 교회이기 때문에 출옥성도들끼리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봉경은 "나는 가지 않겠다"며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유대적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출옥성도라고 자신의 '의'만을 주장하며 나가서 따로 하는 것은 유대적 율법주의의 모습입니다."

무너진 교회 회복에 열정 쏟았던 봉경

3.1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돼 1년간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가 하면 황민화 정책 거부로 4차례에 걸쳐 경찰서에 검속됐던 그는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경산 유치장에서 맞았다. 하루가 지나 유치장에서 풀려난 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산 순교자, 살아 있는 순교자 목사'라는 존경과 함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순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렇게 살아서 돌아온 것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순교신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뿐만 아니었다. 8.15 광복 후, 여운영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부를 설립할 무렵이었다. 여운영 선생은 직접 이원영 목사에게 안동지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나는 목사요 목사는 교회에 있어야 되고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되지 교회 밖에 나가서 정치하면 안된다"며 여운영 선생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경안노회록에 보면, 그는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에 가서 사경회를 인도하며 교회를 회복하는 운동을 펼쳤다고 기록돼 있다. 의성 안동 영주 예천 등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일제강점기에 교회가 통폐합되고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그는 정치 쪽의 요구를 뿌리치고 무너진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1945년 11월 일제에 의해 자신을 면직시킨 경안노회를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쫓겨났던 선교사들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 일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함께 일할 동역자를 키워내는 일을 시작했다. 단기간에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경안고등보통성경학교를 설립했고 이후에 경안성서신학원으로 변경됐다가 오늘날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가 됐다. 옛날 일제시대부터 인노절 선교사 기념성경학교가 있던 자리에 경안고등보통성경학교를 설립했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전통 유림에서 전통 기독교로

봉경의 삶은 주로 퇴계와 비교될 때가 많다. 임 교수는 이황 선생이 도산서원을 세웠듯이 이원영 목사도 성서신학원을 세워 유능한 인재를 양성했다"고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이황 선생이 세웠던 도산서원은 설립 당시 초당하나 짓고 그곳에서 제자를 양성했지만 나중에 거대한 인재양성소가 됐다는 것.

퇴계 후손인 봉경의 생가로 향했다. 서부교회에서 출발해 도산서원을 지나면 원촌 마을과 함께 그의 생가가 눈앞에 펼쳐진다. 친척인 이육사의 생가와 기념관 부근에 봉경의 생가와 묘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1886년에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태어난 이원영 목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 16년간 한문을 사숙하고 문중이 세운 사립학교인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에서 서양학문을 배웠다. 이원영 목사 생가는 지난 2019년 본교단 총회가 제36호 한국기독교사적으로 지정했다.

이원영 목사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는 마지막 여정은 이원영 목사가 처음 복음을 전했던 섬촌 마을. 원촌에서 조금만 돌아가면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그 앞에 섬촌이라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몰돼 아쉽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유림출신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1921년에 풀려난 그는 고향인 원촌에 와서 권찬영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도산서원 앞에 위치한 섬촌 마을에 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섬촌 마을에 기도처를 설립했다. 도산서원 맞은 편, 유림의 한복판인 섬촌마을에 그가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당시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고 문중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온건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분인데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면, 박해가 있고 어려움이 와도 굴복하지 않는 봉경의 삶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문중 사람들은 교회 건축현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건물을 허물기도 했다. 심지어 선교사들이 나서서 교회 재산을 파괴하는 일을 중단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을 하기도 했다. 총회 회의록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도 이러한 사실들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섬촌마을이 전통 유림의 중심지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땜 중앙에는 현재 섬처럼 보이는 시사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퇴계 이황 선생의 명성에 힘입어 과거시험을 치르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과거시험만 치른 것이 아니라 문중 사람들이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국교회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지도자들마저 찾아보기 어려운 시기다. '산 순교자', '선비 목사' 봉경 이원영 목사. 무너진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의 삶을 오늘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고민하며… 김성진 기자



# 제39회 총회장 취임과 신사참배 취소 성명<본보 아카이브>

이원영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역사적 공헌은 신사참배 취소 성명서를 낸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총회장이 된 그는 우선 신사참배 취소 성명을 발표했다. 39회 총회 성명서는 북한에서 피난 온 교회와 노회를 중심으로 이북노회를 인정하고 이북노회가 참여한 전국 범위의 총회에서 취소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본보 1954년 5월 3일자 2면에는 이원영 목사가 제39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취임한 후에 보여줬던 행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당시 총회에 보고한 내용에는 △총회 기간 중 일정한 기간을 정해 통회자복하고 사죄하심을 위해 기도 △신사참배 주동자 약간인을 심사한 후 당 노회를 통해 시벌 △전국 각 교회가 같이 연보해 신사불참배로 순교한 성도 유가족 위문금을 드릴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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