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19년 06월 21일(금) 00:00 가+가-
<3>그리스도론 논쟁
빌립보 가이샤라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졌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오늘날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색깔과 성격이 규정된다. 사실상 고대교회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삼위일체 논쟁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면, 그리스도론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이었다. 니케아(325)와 콘스탄티노플(381) 공의회가 전자를 다루었다면, 에베소(431)와 칼케돈(451) 공의회는 후자를 다룬 회의였다.



'하나님을 낳은 분' vs '그리스도를 낳은 분'

고대교회 신학논쟁의 한복판에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가 있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둘러싸고도 두 학파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키릴루스는 로고스인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육체를 취했지만 인성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고 연합 후 그분은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을 지닌다고 주장한 반면,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키릴루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성의 교류를 통한 신성과 인성의 통일을 강조했다면,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엉뚱하게 그 어머니 마리아가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분'(테오토코스, theotokos)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면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키아학파에서는 인간인 마리아에게 그런 칭호를 돌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428년 성탄절에 네스토리우스는 설교단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은 분'(크리스토토코스, christotokos)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마리아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낳은 분이고, 그분의 신성은 하나님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431년 제3차 보편공의회가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는데 키릴루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먼저 도착하여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오기도 전에 개회를 선언하고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분으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결의했다.



'혼합없이, 변함없이, 분할없이, 분리없이'

표면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주장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학파는 에베소공의회의 부당함과 오류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였고 논쟁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얼마 후 유티케스(Eutyches)가 등장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의 신성이라는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포도주"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육신 과정에서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어 버렸고 오직 하나의 본성 즉 신성만이 남았다고 주장하면서 키릴루스의 견해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로마 감독 레오 1세가 편지(Leo's Tome)를 통해 유티케스를 정죄하고 안티오키아학파의 지도자들을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공의회가 요청되었다.

451년 10월 8일 콘스탄티노플 근처 칼케돈(현재 터키 이스탄불 건너편 카디쾨이 Kadikoy)에서 4차 보편공의회가 개막되었다. 논쟁 끝에 10월 25일 칼케돈 신조(혹은 칼케돈 정의)가 발표되었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즉 두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하였고, 동시에 에베소공의회에서 결정했던 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임을 확인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신성으로는 시간 이전부터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 인성으로는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러면서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없이(unconfusedly), 변함없이(unchangeably), 분할없이(indivisibly), 분리없이(inseparably)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 네 단어를 서로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했다. 안티오키아학파는 '혼합없이, 변함없이'라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며 섞일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학파는 '분할없이, 분리없이'라는 표현을 부각하면서 그리스도의 한 본성과 한 위격에 대한 강조라고 주장했다. 칼케돈 신조는 사실상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의 주장을 세심하게 절충한 타협안이었던 것이다.



이해를 넘어 믿음으로, 믿음을 넘어 따름으로

칼케돈공의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확인되었지만 그 결정은 새로운 논란과 분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 본성을 주장하는 극단적 단성파가 갈라져 나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가 하나인지 둘인지를 둘러싼 단의론-양의론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어지는 그리스도론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의 관심사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자유의지와 은총의 관계 논쟁, 교회론을 둘러싼 도나투스논쟁 등이 중요한 관심의 주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우리 구원의 문제가 달려 있는 핵심이기에 논쟁은 치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지나치게 합리화시키거나 이해가능하게 설명해 보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는 것은 성도들과는 무관한 지적 유희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후스토 곤잘레스가 말한 것처럼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적이고 사랑스런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구세주를 사색적이고 논쟁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구원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제자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해를 넘어 믿음으로, 믿음을 넘어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

박경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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