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황금관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으셨다
<8>서임권 논쟁
작성 : 2019년 11월 28일(목) 14:45 가+가-
1077년 1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카노사의 눈 덮인 성 앞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맨발로 무릎을 꿇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용서를 비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세기 동안 누가 더 높은지를 다투던 황제와 교황의 줄다리기가 교황의 한판승으로 결판이 난 것이다. 이를 역사는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서임권 논쟁

문제의 발단은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敍任權)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황제나 국왕이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주교들과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1073년 새로 교황에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평신도인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성직 매매를 부추겨 교회를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성직 임명권은 국왕이 아니라 교황에게 속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에 왕들이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이용해 정치자금을 확보하거나, 공석이 된 성직에 후임자를 빨리 임명하지 않고 미뤄 그동안의 교구 수입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교회개혁을 위해서라도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은 반드시 교황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의 서임권 요구는 황제와 국왕으로서는 자신들의 수입의 원천을 탈취하는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1076년 1월 24일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는 법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한 달 뒤인 2월 22일 이번에는 교황이 하인리히를 파문하는 교서를 공포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 하인리히에게 바쳤거나 앞으로 바치게 될 충성 서약의 짐을 그들에게서 벗겨주는 바이며, 누구든지 그를 황제로 섬기는 것을 금한다'고 밝혔다. 당시 민심은 교황의 편으로 기울었고, 결국 하인리히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난히도 추웠던 1077년 1월 겨울 눈밭에 엎드려 그레고리우스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카노사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굴욕의 장소요, 교황의 입장에서는 승리의 장소로 여겨졌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사건을 교회의 승리로 간주하고 기뻐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는가!



카노사의 굴욕

1076년 성탄절을 앞두고 하인리히는 아내 베르타와 어린 아들 콘라트와 함께 교황의 사면을 받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의 카노사성으로 가고자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다. 거의 한 달 만에 카노사에 도착한 황제는 1077년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추위에 떨면서 참회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했다. 어쩌면 하인리히의 눈물은 위선적인 '악어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교황은 카노사성의 주인인 마틸다와 클뤼니 수도사 위고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문밖에 세워두었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성 안쪽으로 받아들이고 사면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카노사의 굴욕 사건 이후에도 그레고리우스와 하인리히는 계속 충돌했고, 1080년 3월 교황은 다시 황제를 파문하고 루돌프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 황제도 물러서지 않고 같은 해 6월 그레고리우스의 폐위를 선포하고 라벤나의 대주교를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의 새로운 대립 교황으로 선출했다. 1081년 하인리히는 4년 전 참회자의 신분으로 넘었던 알프스를 이제는 그레고리우스를 폐위시키기 위해 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르만족 지도자인 비스카르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오히려 로마를 약탈하고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자 민심은 그레고리우스를 떠나 하인리히에게로 향했다. 결국 교황은 폼페이에서 남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살레르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85년 5월 25일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서방 교회에서 성직자 독신주의를 확립한 도덕 개혁자로, 교황권이 세속권보다 위에 있음을 천명한 교황권 옹호자로 로마가톨릭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지금 살레르노의 성 마태 교회당에 묻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서임권을 둘러싼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교황을 지지하는 겔프파(Guelphs, 겔프 가문에서 비롯됨)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파(Ghibellines, 기벨린 가문에서 비롯됨)로 양분되어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서 계속 전쟁이 이어졌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중세 시대를 통해 교황과 국왕은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다투었다.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큰지를 두고 논쟁을 한 것처럼 말이다. 국왕은 자신이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왕관을 이중(二重)관으로 만들었고, 이에 질세라 교황은 삼중(三重)관을 만들어 썼다. 이렇게 해서 삼중관은 교황의 상징이 됐다. 국왕이 달이라면 교황은 해라고 주장하였고, 교황권이야말로 최상의 유일한 권위라고 선언했다. 과연 더 크고, 더 높고, 더 화려한 관을 머리에 썼다고 승리한 것인가? 예수께서는 머리에 황금으로 만든 삼중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지 않았는가!

주님께서는 서로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이 가르침을 실천하셨다. 주님은 황금관을 쓰지도 않으셨고, 권세의 상징인 지팡이를 지니지도 않으셨다. 오로지 겸손의 상징인 수건만을 지녔을 뿐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서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섬김과 겸손과 사랑을 되새기게 된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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