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인가, 공의회인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20년 02월 28일(금) 16:41 가+가-
<11>공의회 우위설 논쟁
아비뇽 교황청

중세 교회를 떠받치고 있던 로마가톨릭교회 위계질서의 정점에 교황이 있다. 교황의 권력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이라면, 황제의 권력은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달에 불과하다고 비유될 정도로 그 권력은 막강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는 1302년 '우남 상탐(하나의 거룩한)'이라는 교서를 통해 교황권이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유일한 권위이며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이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체의 교리가 로마 교황의 권위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비준하고, 정의하는 바이다.' 가히 교황권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튼튼해 보였던 교황권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민족국가가 점차 강성해지면서 그에 비례해 교황의 권력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대반전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프랑스 출신 추기경을 이탈리아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교황 클레멘트 5세(재위 1305~1314년)로 세웠고, 교황청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기도록 강제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아비뇽 유수(幽囚)'라 부른다. 이후 거의 70년 동안 아비뇽교황청 시대(1309~1377년)가 열렸고, 이 기간 동안 재위한 일곱 명의 교황 모두가 프랑스 출신이었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교황청의 대분열

아비뇽교황청은 그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다는 듯 높고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과거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7명의 교황들(클레멘트 5세, 요한 22세, 베네딕투스 12세, 클레멘트 6세, 인노켄티우스 6세, 우르바누스 5세, 그레고리우스 11세)은 이곳에 마치 죄수처럼 갇혀서 전체 그리스도교를 대표하기보다 프랑스의 이익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고, 따라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당대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1304~1374년)는 아비뇽을 가리켜 "모든 악의 하수구, 모든 범죄의 소굴, 서방의 바벨론"이라 비판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재위 1370~1378)가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면서 비로소 아비뇽교황청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교황이 로마로 귀환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그레고리우스 11세를 이어 우르바누스 6세(재위 1378~1389년)가 아비뇽에서는 클레멘트 7세(재위 1378~1394년)가 교황좌에 올라 교황청이 둘로 분열됐다. 이른바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청의 대분열(1377~1415년)이 일어난 것이다.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피사공의회(1409년)는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알렉산더 5세를 세웠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공의회우위설의 등장

교황청이 분열되고, 급기야 세 명이 서로 자신이 적통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대표기구인 공의회의 위상을 더욱 굳건하게 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공의회가 모든 교회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공의회우위설(conciliarism)'이 등장한 것이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세움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공의회의 권한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의회우위설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콘스탄츠공의회(1414~1418)이다. 콘스탄츠공의회는 "누구나, 어떠한 신분이나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앞에서 말한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나님 교회의 머리에서 지체들까지의 전반적 개혁에 관계되는 사안에서 이 공의회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공의회우위설의 대변인이었던 독일 니하임의 디트리히(1345~1418)는 '교회 일치와 개혁의 방법'이라는 책에서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언정, 보편교회회의인 공의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주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어지럽힌다면 폐위돼야 하는 것처럼, 교황도 교회를 올바로 섬기지 못할 때에는 폐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피에르 다이(1351~1420년) 또한 교회를 대표하는 회의체인 공의회가 교황을 치리하거나 폐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세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요 신비주의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장 제르송(1363~1429년)은 교회의 평화와 일치와 개혁을 가로막는다면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폐위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공의회우위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콘스탄츠공의회는 로마, 아비뇽, 피사의 세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1417년 11월 마르티누스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대분열의 막을 내렸다.

교황, 공의회, 성경

중세 후기 교황청의 분열과 교황의 난립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으로 등장했던 공의회우위설은 시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교황을 위계질서의 정점으로 삼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교황보다 공의회의 위상이 상위에 있다는 주장은 언제나 성가신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가톨릭교회는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 때 교황무오류설을 공식 교의로 채택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공의회우위설을 철회했다. 현재 로마가톨릭의 교회법은 교황이 '공의회에서 취급할 사안을 결정하고 공의회의 진행규칙을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것을 친히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주재하고, 공의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중단하거나, 해산하거나, 그 결의한 바를 인준하는 것은 로마 교황의 권한에 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공의회우위설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있어서 누가 혹은 무엇이 최상의 권위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이라는 개인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공의회우위설은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집단지성을 신뢰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이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와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한 교황 개인이나 교회 대표자들의 회의보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최상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신앙과 실천의 근거요 원리이며 동력이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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