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의 생애
[ 선교여성과 교회 ]
작성 : 2021년 03월 24일(수) 13:43 가+가-
김마리아 리더십 소고 ①

여전도회관 1층 역사전시관의 김마리아 전시. / 한국기독공보DB

김마리아(1892-1944)는 평생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이다. 그녀는 고향 황해도 장연 소래의 한반도 내 개신교 최초 교회를 설립하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한 광산 김(金)씨 성섬 집안의 기독교 입신 이후 3세대에 해당하는 신여성으로 대한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개신교 지도자였다.

그녀는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 영문과 수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비밀리에 반입해 유포하며 국내 3.1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등 국내 독립운동에 투신해 일경에 체포, 수감돼 고초를 당했다.

1921년 중국 상해로, 1923년엔 다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1932년 귀국 때까지 10여 년 이상을 해외에서 수학하며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했다. 귀국 후 1933년 봄,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해 1943년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다 1944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평양 기독병원에서 1944년 3월 13일 향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본 논문은 김마리아에 대한 기존 연구, 특히 박용옥의 김마리아 생애 일대기를 그린 연구의 결과에 기대어 있다. 박용옥의 연구 이후 최근까지 김마리아 연구는 박용옥의 연구를 기초자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생애 구성을 바탕으로 김마리아의 독립운동과 정신, 그의 사상의 선교적 조망, 식민지 시기 신여성으로서의 김마리아, 일제강점기 여성지도력 유형비교 등의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와 같이 박용옥의 김마리아 연구는 이후 진행된 연구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도 김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기본 기술은 이 연구결과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후에 새로이 발견된 사항들의 반영은 전병무의 연구에 기대어 있다.

기존의 연구결과에 기초해 김마리아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녀는 언제나 한국 여성들의 모임을 주도 혹은 조직해 발전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유학 때 그녀는 재일 조선인 남자 유학생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와는 별도로 제일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이 조직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고모인 김필례를 뒤이어 1917년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돼 이끌어 나갔다.

국내 독립 운동 중 1919년 10월 여성계 대표 16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돼 침체돼 있던 여성 민족운동을 이끌어 한 달여 만에 회원 2000여 명, 전국 15개 지역, 해외지부 설치 등 조직을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망명 중에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거처하는 곳에서 조직해 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1928년 1월 뉴욕에 있는 여자유학생들을 모아 '근화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했다. 귀국 후 김마리아는 1933년 '장로교여전도회' 7대 회장으로 선출된 후 4년간 회장을 맡아 여전도회 조직을 크게 발전시켰다.

본 논문은 김마리아의 생애 동안 그녀가 관계한 조직 및 기관의 발전을 통해 드러난 그녀의 리더십을 확인하고, 리더십의 바탕이 된 그녀의 사상은 파편적이나마 현존하는 그녀의 글들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김마리아가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문', 파크대학에서 조국에 있는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글, 근화회 조직 취지문, 귀국 후 종교시보에 게재한 '조선기독교여성운동' 등이다.

김마리아의 리더십과 사상 연구를 통해 오늘 기독교계의 리더십의 문제를 재고하고, 사적 출세와 권력 추구와는 거리를 두고 오직 여성들의 실력양성과 협력, 연대를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녀의 사상과 지도력에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미래상을 찾는데 기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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