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애로와 문제를 교회의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 연중기획ESG ]
작성 : 2022년 02월 08일(화) 08:08 가+가-
새롭게 이롭게- S(2)재난시대 교회의 사회적 책임
인류역사상 재난은 계속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재난의 강도나 범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 지진, 폭염, 혹한, 폭우, 태풍 등 재난의 강도가 강해짐에 따라 노인, 어린이, 장애인, 이주민, 난민 등 이에 취약한 계층은 이중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 '코로나19'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온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만족을 모르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사람들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했고 그로 인해 인수공통전염병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이러한 재난의 위기 속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역사적으로 더듬어보며 오늘 한국교회의 사명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재난상황이라 '재난'과 연관된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재난에 대한 법률 제17383호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는 재난을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 전체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 재난을 자연재해와 인적 재난과 사회적 재난의 3가지로 분류하다가 최근 인적 재난과 사회적 재난을 사회재난으로 통합했다. 사람들의 부주의로 일어난 대형 사고와 국가 인프라에 발생한 장애와 전염병 확산도 사회재난에 해당한다. 자연재해든 사회재난이든 사실상 창조세계인 지구를 잘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우리 사람들에게 있다고 자인하면서 재난시대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

주후 165~180년 고대로마에 천연두가 창궐해 500여 만명이 사망했을 때, 로마 시내 곳곳에 방치된 시신을 치운 건 카타콤에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이었다. 주후 25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염병으로 전인구 3분의 2가량이 죽어갈 때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마치면 거리로 나가 환자들을 돌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서신에서 기독교는 초기부터 사랑과 선행의 신앙으로 교회공동체 결속과 사회봉사에 헌신했고, 감염병 앞에서도 더 훌륭하게 대처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월등히 높은 생존율을 보였는데 이유는 교회공동체가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 역사 가운데 전염병으로 가장 비참하고 피해가 컸던 경우는 14~17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였다. 쥐벼룩으로 옮겨진 바이러스에 확진 되면 몸에서 열이 나고, 피부가 괴사하면서 검게 변하고(흑사병), 사흘에서 닷새 만에 피를 토하며 죽는 대단한 전염병이었다. 남편도 감염된 아내를 버렸고 부모도 자식을 버렸다. 추산하기로 7500만~2억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중세의 교회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이 만연할 때 중세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전염병의 확산 속에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중세 가톨릭 교황 클레멘트 6세는 공간의 권위를 지키고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자면서 신도들을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도록 했다. 결국 성당은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어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중세 가톨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감염을 무시했던 중세 가톨릭교회는 신뢰를 잃고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한국교회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떼를 돌볼 다른 목회자가 있다면 위험지역을 떠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루터는 영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피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츠빙글리도 위험을 무릎 쓰고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흑사병에 전염되었고 자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칼뱅은 미리 구빈원을 만들어서 사회봉사를 했고 제네바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환자격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래서 노약자를 비롯하여 감염에 노출이 쉬운 사람일수록 교회 출입을 통제하면서 대신 목회자들이 환자를 찾아가는 심방 예배를 장려했다. 칼뱅은 예배의 소중함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는 1600만명, 천도교 200만명, 기독교인은 20만명이었다. 33인의 대표중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4명, 불교인 2명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이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장로교단을 비롯한 기독교계가 가장 심한 피해를 보았다. 이처럼 3.1운동의 지간(枝幹)에는 어디든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것은 기독교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 되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루려는 애국의 마음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전쟁고아와 장애인 그리고 독거노인들이 사회문제화 되었을 때 미국을 비롯한 외원단체와 관련된 한국교회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회사업을 앞장서 전개해 왔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 주님의 긍휼을 실천하므로 사회복지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60∼80년대 막혀 있던 언로를 대신하고, 유신체제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구속자들을 위해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국교회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 1972년 유신헌법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74년부터 시작된 목요기도회는 엄혹했던 독재시절 인권 문제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사회에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던 동시에 구속자 가족과 목회자, 평신도, 비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연대와 결단의 자리였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도피성으로서의 교회였는데 노동자들의 야학과 도시빈민의 공부방 그리고 도서벽지의 무료 진료 등은 한국교회 대표적인 섬김 사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책무는 기독교인들로서 마땅한 사명이라 여겨서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복역과 수많은 핍박과 탄압을 달게 받았다.

주후 46~47년 팔레스틴 전역을 황폐하게 한 대기근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생활고를 악화시켰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과 궁핍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갈라디아 교회,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 구호 헌금을 부탁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수많은 핍박을 가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을 바울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민족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라도 기꺼이 받겠다고 고백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야말로 지도자의 첫째 자격이요 한국교회의 사명이었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 역시 많은 고충과 아픔이 있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초기 기독교가 이교도들과 달리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전염병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돌본 것이 기독교 확산에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거대 왕국을 이룬 중세 가톨릭교회는 전염병에도 사람들을 성당에 모이게 했다가 오히려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어 수많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예배의 횟수와 회집인원의 크기가 아니다. 우리 국민의 애로와 문제를 교회의 기도제목으로 삼자. 오미크론시대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과 의료진, 자영업자, 비정규직, 임대교회 등 다양한 이들의 이웃으로 말이다.



김종생 목사

글로벌디아코니아센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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