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 목양칼럼 ]
작성 : 2023년 08월 30일(수) 18:17 가+가-
어린 시절 교회 사택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리운 추억보다 달갑지 않은 기억이 더 자주 떠오른다. 시골 교회 전도사였던 아버지는 주중에 학교 기숙사에 계셨고,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외딴 사택에 머물러야 했다. 사택 옆에 붙은 교회 창고에는 상여가 있었다. 어린 나의 눈엔 그것이 왜 그리 흉물스러웠는지, 밤만 되면 방 밖으로 나서기가 무서웠다. 그 때는 구걸하러 찾아오는 걸인들도 많았고, 어린 나에게 교회는 불안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자라면서 한 번도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성장한 필자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입성하게 됐다. 법학을 공부하게 된 나는 검사의 꿈을 키워갔다. 법을 공부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사법고시에 합격해 사회 정의에 투신하고자 하는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어려운 때였다. 특히 광주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무력으로 짓밟혔고, 피 끓는 젊은 학생들에게 정권은 타도의 대상이 됐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더 이상 공부하기 어려웠다. 사법고시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꿈꾸는 기회주의자로 취급 받던 시절이었다.

군 생활을 전방에서 마치고 복학해 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눈치 보느라 고시 공부를 하지 못하던 친구들이 졸업과 동시에 고시촌으로 많이 들어갔다. 나는 졸업 후에도 계속 고시 공부를 할 형편이 못 돼 검사의 꿈을 접고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통하여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기업이라는 곳에도 정치가 있고 권모술수가 있고 다툼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법학 전공자라고 노무관리를 맡게 됐다. 노동조합을 관리하고 협력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조합원이 8백 명 정도였다. 위원장을 뽑을 때는 대통령 선거를 방불케 했다. 노무관리를 하다보면 조합원들의 가정사와 개인사까지 다 알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별의 별 일들을 보고 듣고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목회를 하면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것에 수월한 것 같다.

목회현장에서 어떤 집사님은 전세금을 못 받게 돼 내용증명을 보내고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전세금을 받아 주었던 일, 보이스 피싱으로 피해를 입은 어느 청년에게 경찰과 협조해 피해금을 환수해 준 일 등 법무사인지 목사인지 모를 정도로 성도들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준비하심이고 은혜였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부모님은 첫 아들인 나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셨다. 나는 목회자의 길이 얼마나 험하고 척박한 길인지 잘 알았기에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멀리 달아나고자 했다. 그런데 1997년 연말에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처하고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국가부도 사태를 면하게 되는 IMF 사태가 일어나면서 일상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회사를 퇴직하고 사업을 준비하고자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만져 주셨다. 세상에서 시달리고 상처입어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필자를 부르셨다. 탕자와 같은 나를 기다려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한참을 울고 나니 선지동산에서 말씀을 배우고 있었고, 또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거울에 비춰진 나를 보니 목사가 돼 있었다. '부모님의 서원 기도가 이런 힘이 있구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겸손히 허리띠를 다시 동여매게 된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김기용 목사 / 당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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