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은 가방, 해진 외투조차 부끄러웠던 빈민의 벗
[ 한국교회인물열전 ]
작성 : 2021년 04월 27일(화) 19:34 가+가-
2. 빈민의 아버지 수암 이연호 목사

이연호 목사가 설계한 이촌동교회.

게다짝 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단 판잣집 모형.
학창시절엔 해어진 교복 한 벌, 빈민촌에서 목회할 때도 양복 한 벌이었던 '빈민의 아버지' 수암 이연호 목사. 빈민과 우리 민족의 고난을 짊어지고 몸부림쳤던 그는 참된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줬기에, 오늘날 그의 삶이 재 조명될 수 있으리라. 초년 기자 시절, 자그마한 체구에 매주 원고 뭉치를 가지고 편집국을 찾아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 떠나기 3년 전, 그는 본보에 '살며, 바라며' 제하의 회고록을 연재했다. 당시 그의 글 속에는 고단했던 삶의 뒤안길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술로 승화시킨 진솔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춘천고보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는 수암이 일제시대에 민족운동을 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에는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을 벗 삼아 목회했던 힘의 원천을 세가지로 언급했다. "하나는 어려서부터 산기도를 시작했던 그의 신앙심이다. 또 하나는 민족 전체가 인권을 빼앗긴 걸인이 되었는데 가정이나 개인의 빈곤쯤이야 하는 민족의 운명에 대한 자각이다. 그 보다도 수암으로 하여금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한 것은 고난을 미적 세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예술적 능력이다."
이촌동교회 담임 김성진 목사(우)와 이촌동교회 출신인 배현주 교수(좌).


민족의 고난에 눈뜬 학창시절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5세 되던 해에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했다. 가난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유 교수는 "춘천고보를 다니는 5년 동안 그의 동복은 단 한 벌이었고, 일본으로 졸업여행을 떠날 때는 여비가 없어 학교에 혼자 남아 자습을 해야 하는 쓰라림을 체험했다"며 학창시절 이연호에 대한 기억을 소개했다. '이연호 평전'을 쓴 최종고 교수는 그가 민족의식 때문에 학교생활이 조용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누군가는 이 민족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결심한 그는 1926년 일본인 교사의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경찰에 검거되는가 하면 비밀독서회를 운영하며 민족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1938년 일본제국 경찰에 발각돼 재판을 받고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당시 100여 명이 검거됐던 이른바 상록회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민족주의는 혈통이 같은 민족이 다른 민족의 침해를 받지 않고 자기 민족이 정치와 경제 등 모두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조선인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조선 민족의 손에 의해 정치와 경제를 모두 통괄하는 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경찰심문에서 밝힌 답변이다. 상록회 회원들의 애국심을 기리고 숭고한 뜻을 전하고자 춘천고 교정에는 상록탑이 건립돼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이연호(윤중식 작, 1972)
빈민굴에서 목회의 길을 걷다

학창시절, 그는 톨스토이와 춘원 이광수, 가가와 도요히코의 서적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도 예수와 더불어 빈민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지배자의 위치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삶을 같이 하는 친구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출옥한 후, 그는 사상범 훈련소인 대화숙에서 지냈다. 그곳 바로 뒤가 판잣집과 토막 움집들이 밀집해 있고 걸인 불구자들이 거처하는 빈민촌 호반재였다. 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일생을 바쳐 일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1944년 감리교신학교 학생이 되어 신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가 한번은 거리에 쓰러져 있는 거지아이를 데려와 자기 방에 재우며 기숙사에서 주는 죽을 나눠 먹었다. 그는 이렇게 빈민목회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쓰던 철모를 구해 이것으로 보리쌀을 삶고 소금을 반찬으로 삼아 생활하며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성경이야기를 전했다. 이듬해 친구가 보내준 돈으로 호반재 빈민촌 노동자 합숙소였던 판잣집 한 칸을 구입해 거처 겸 주일학교 교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게다짝 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았다. 지난해,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역사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초대관장이었던 이연호 목사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했다. 지난 4월 8일 장신대 임희국 교수의 도움을 받아 방문했던 역사박물관에는 게다짝 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단 판잣집 모형이 전시돼 있어 당시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연호 목사.
이곳에서 그는 의료봉사를 온 젊은 여의사 정용득을 만나 결혼했다. 정용득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재원이었다. 그러나 양가에서 모두 반대해 두 연인은 물 한 사발을 떠놓고 백년가약을 약속했다.

호반재에서 시작된 그의 빈민 목회는 다시 서부이촌동으로 옮겨졌다. 1945년 서울에는 큰 홍수가 발생해 한강 다리 옆 서부이촌동은 대규모 빈민 밀집지대가 돼 버렸다. 당시 이곳에서 전염병이 시작됐고 술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도 대부분 이곳이었다고 한다. 3년간 사역했던 호반재를 떠나 이촌동으로 옮겨 성라자로교회(오늘날 이촌동교회의 모체)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빈민촌 목회를 시작했다. 이촌동을 둘러본 그는 이곳이 바로 자신의 목회 현장이 돼야 한다고 다짐했다. 허름한 판잣집 한 모퉁이 방으로 이사했다. 홍수에 절반이나 물에 잠겼던 집이라 벽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지붕은 천막으로 간신히 덮여 있었다.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저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는 일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우선 동네 어린이들을 한강 모래밭에 모아놓고 성경이야기를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비가 올 때면 자신의 거처를 예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결혼한 지 얼마 후에도 4, 5명이 한 방에서 자던 일이 보통이었다. 폐병으로 우리 방에서 죽은 부인도 그 중 한 사람이며 미군부대에서 다리를 분지른 고아가 와 있던 것도 이 무렵이다. 한때는 쓰레기 줍던 청년들 십여 명과 한솥밥을 먹으며 나도 쓰레기 광주리를 메고 다녔다." 그의 일생은 빈민들과 더불어 살았고 그것이 그의 목회의 전부였다. 그는 평생 검정색 단벌 양복에 똑같은 넥타이, 낡은 가죽가방 차림의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 "떨어졌으나 가방을 들고, 헤어졌으나 외투를 입고 그들의 앞을 지나왔다… 나의 생활이 최저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들을 대할 때마다 죄를 짓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빈민을 위한 그의 진실된 고백이었다.

이촌동 판잣집 풍경(1960). 이연호 작.
교회와 병원 건립

그는 한 친구의 추천으로 미군부대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교회당을 건축할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내일이면 그새 밀렸던 목수 임금과 필요한 재료비가 있어야 한다. 이연호는 근처 신용산의 미군부대를 방문해서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다. 그랬더니 한 미군이 이연호의 신분에 대해 질문을 했고 그래서 직접 이촌동 교회당 짓는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기 지갑을 꺼내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 그래서 다음날 필요했던 목수 임금과 재료비가 하룻밤에 해결됐다."

당시 서울 YNCA 총무였던 조지 피치 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48년 2월 16일 그의 삶이 미국 시사주간이 TIME지에 게재됐고 이후에도 소개됐다. 그후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의 '콘셋'(간이 병사) 건물 한 동을 기증했고 김구 선생은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찾아와서 20만원을 기증했다. 또 서울시장 고문 윌슨 대사며 윤보선 시장 등의 호의로 하천부지 사용이 인가됐고 이기봉 시장 등의 협조로 병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그의 아내는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말쑥한 벽돌 종각의 교회, 그리고 열개의 병실을 갖춘 아담한 병원… 빈민들을 위해 생을 헌신하겠다는 한 청년의 기도가 그렇게 조금씩 이뤄져 갔다.

그가 빈민 목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물질과 신체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인격을 존중해 주고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라고 했다. 비록 일그러지긴 했으나 그들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도시공원이 된 언덕: 이촌동 풍경(1952). 이연호 작.
예술로 승화시킨 삶

그는 고난을 미적 세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그는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설하고, 화가이자 비평가, 미술사가로서 기독 미술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외국의 발달된 기독교 미술을 소개하고 선도하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했다. 휴전이 되고 이연호는 미국 유학을 떠나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 부인의 발병 소식을 접하고 귀국해 간병에 정성을 쏟던 중, 1956년 경기노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인의 건강이 회복된 후, 다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서울장로회신학교와 장신대 감신대에서 기독교미술에 대한 강의도 했다.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가 열리면서 강력한 도시계획에 따라 빈민가는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을 바라 보면서 그는 가난한 자, 억울한 자의 친구로 곁에 있었다. 이촌동교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실리카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의 절충적 양식의 설계에 내부의 등과 외부의 창, 기타 장식물에 한국적 전통미가 결들여진 설계로 교회를 새롭게 건축했다. 한국적 전통미를 살리기 위해 예배실 앞 출입문은 한국식 창호문으로 설계했고 축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청실홍실 등을 달았다. 기둥 밑에는 한국고유의 장식인 익공을 붙였다. 그리고 42년 목회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그리고 1999년 2월 6일 더 이상 빈민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본보에 연재한 이연호 목사의 회고록.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교회에 대한 사랑, 진리와 학문에 대한 열정, 민족과 세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관심, 이런 가치를 삶과 설교를 통해 가르쳐준 분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한 것은 특권이자 책임으로 여겨집니다." 이촌동교회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배현주 교수는 이연호 목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빈민의 아버지'로 불린 이연호 목사의 삶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김성진 기자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