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과 일본의 교류역사, 친일 강요당한 교회
[ 선교여성과교회 ]
작성 : 2024년 07월 25일(목) 01:58 가+가-
경남지역 여전도회 17
조선교회의 중심이었던 평양과 서울에서 항상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부산은 전통적인 교류의 땅이었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부산의 숙명적인 교류의 대상은, 국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중국보다는 일본이었다.

부산은 오래전부터 외국 특히 일본과의 자발적이거나 강제적인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리적으로 일본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왜구들이 침입이 잦았다. 국력이 강화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이 더 이상의 침입이 어렵게 되자, 평화적인 무역을 요구해왔고, 조선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407년에 부산포를 개항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425년 세종 5년에 다시 부산포를 열어 무역을 허가했다. 이로 인해 중종 때에는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300여 명에 이르러 조선관원들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는 연산군 시기에 더욱 심해졌으며, 1506년 중종이 즉위한 후 이들을 엄격히 통제하자 충돌은 더욱 잦아지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인들이 1510년 4월 대마도에서 온 일인 4000명과 합세해 난을 일으켜, 부산 첨사를 살해하고, 동래성을 포위 공격하여 민가들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다시 교류가 단절되었으나 중종 7년 1512년 8월에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다시 교류를 재개했다.

중종 36년 1541년에 왜관이 부산포에 설치되었으며, 이후로 부산포는 일본과의 외교와 교역의 중심이 됐다. 무엇보다 1592년 4월 13일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부산은 일본의 조선침략의 교두보가 되었고, 7년 동안의 일본군의 주둔으로 인해 많은 피해와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활동하는 상인들 중에서 개성상인(송상), 의주상인(만상), 그리고 부산의 동래상인(내상)이 으뜸이었으며, 특히 동래상인은 국내무역과 함께 왜관을 거점으로 활발한 대일무역을 펼치며 상권을 장악했다.

또한 임진왜란 후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활을 만드는 재료인 무소뿔이 동래상인들에 의해 동남아시아로부터 일본을 거쳐 수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산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지의 역할도 수행한 곳이었다.

1876년 개항을 통해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됐으며, 부산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쳐 들어오는 외국인들과의 활발한 교류의 땅이 되었다. 부산의 초량 왜관은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되었고, 곧 이 지역의 정치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 이곳은 새로운 문화문물이 첫발을 들여놓는 곳이었으며,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

# 친일과 배교를 강요당한 교회

일제강점기 부산은 항일 순교의 땅인 동시에 친일 배교의 땅이었다. 순교로 신앙을 지킨 믿음의 선진들과 많은 독립 운동가들도 부산에서 활동했던 반면,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부산에서 활동했다.

용두산 자락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에는 개항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부산지역 영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하에는 동양 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1929~1945), 해방 후에는 미국 해외공보처 미문화원 및 미국영사관(1949~1999),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국대사관(1950~1953)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2003~현재)은 격동의 부산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 역사관 인근에는 안희제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백산상회 자리에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 전시체제하에서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로 인한 형극의 길을 걷게 된다. 경남지역 장로교단의 전시협력활동은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결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후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선교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경남노회와 갈등했다. 1939년 1월 14일에는 선교회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공문을 보냈으며, 이에 대하여 경남노회는 유감을 표명한다. 이러한 갈등은 당시 노회임원들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의 임원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남노회는 1940년 2월 개최된 경남노회 임시회에서 "경남노회 관하에 와서 선교하는 호주선교회는 과거 40년간 우리 노회와 피차 협조적 정신 하에 순조롭게 지내왔으나 근래는 그 이해와 인식이 상이하여 유감이던 중 작년 1월에 선교회는 정식으로 결의하여 해 선교회의 방침에 반대되는 기관은 금후 유지, 원조, 협동하지 아니하기로 성명하고 교육사업으로부터 인퇴하게 된지라"라고 밝히고 경남노회장 심문태 명의로 선교회를 비난하는 통지문을 경남 각 교회에 발송하였다.

경남노회의 이러한 친일활동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으로의 조직 개편을 통해 더욱 구체화하게 된다. 1940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의 친일행적이 아래와 같이 기록돼 있다.

"소화 14년 총회에서 본 연맹을 주도한 후 각 노회와 지방 교회에서 애국 운동에 총동원 한 결과 단기일에 놀랄만하게 그 성과가 되었습니다. 보다도 감사한 것은 복잡한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장로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병금, 국방현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수자로 표시 되었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은 본격적인 전시협력활동을 위한 기관지발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1940년 '장로회보'를 발간한다. 1940년 3월 20일자 '장로회보'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 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노회지맹의 결성에 대해 "국민정신총동원 경남지회지맹 결성식은 소화15년 2월 12일에 전회원이 회집하여 결성식을 거행하였다고 하는데, 먼저 전회원이 기립하여 궁성요배 등의 예식을 거행한 후 개회를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경남노회지맹 산하 각 교회별 조직인 애국반의 조직보고가 '장로회보' 21~27호(1940년 6~7월)에 상세하게 게재돼 각 교회별 전시협력활동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경남노회 조직을 기반으로 구성된 국민정신총동원 경남노회지맹은 지역 장로교회의 전시협력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설립되었고, 그후 각 지역별로 교구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경남교구회는 부산교구, 진주교구, 마산 교구, 거창교구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경남교구회의 주요 실천사항은 대동아전쟁 협력, 교회의 전시체제화, 징병제 강조, 일본문화의 적극적 수용 등을 포함하였다.

경남지역교회는 경남교구회를 통해 신사 참배와 황국신민교육을 받아야 했고, 소위 대동아전쟁의 목적 완수를 위한 국방헌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경남교구회는 시국강연과 징병제강연회 등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전시체제하 경상남도지역 장로교단의 전시협력활동은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시작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남 노회지맹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회 그리고 조선임전보국단 경남지부 등의 친일조직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이뤄졌으며, 특히 일부 장로교회지도자들의 전시협력활동은 단지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만 이뤄졌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적극성을 띄고 있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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