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교회는 삶의 터전이었다"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2월 28일(금) 09:23 가+가-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
②피란민 상처, 피란민교회가 돌봐

피란민교회가 보관하고 있는 옛 사진들. 사진마다 어른보다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응만 장로님, 조상구 장로님, 오기병 장로님, 오기억 장로님…, 모두들 한마음으로 교회를 이끄신 분들입니다." 영도교회 설립을 주도했던 이응만 장로의 아들 이대운 장로가 역대 장로들을 소개하고 있다.
피란민이 세운 서북교회(현 동광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김원남 은퇴 장로와 김명화 권사, 부부는 1944년생 동갑내기로 7살에 남하해 교회에서 만났다.

#1 부산에서 만난 6.25전쟁 피란민들
"모든 것 버리고 목숨만 구해 남하"


【 부산=최샘찬 기자】"만주에서 아버지가 약방을 하셨는데 당시 공산당들이 토지 무상 분배를 하면서 재산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뺏는 방법은 간단하죠. 인민재판에서 즉결처분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겁니다. 정보를 미리 전해들은 아버지가 먼저 피신했고, 어머니와 제가 화물차를 타고 뒤따라 갔습니다."

피란민들이 모여 세운 부산노회 영도교회(김덕신 목사 시무) 이대운 은퇴장로는 6세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6.25 전쟁의 피란민들은 재산과 토지를 빼앗기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쳐 나왔다. 부산 남포 자갈치시장에 세워졌던 서북교회(현 동광교회, 신재승 목사 시무)의 김명화 은퇴 권사도 사지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온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나온 당시 7세의 김명화 권사는 "어린아이들을 짐짝처럼 던지고 받았으며, 못 받으면 그대로 떨어져 죽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온 김원남 장로(동광교회 은퇴)도 "많은 사람들이 기차 위 짐 싣는 곳에 매달렸고 부모가 졸다가 아이를 떨어뜨리기도 했으며, 터널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 사람도 많았다"며, "역을 지날 때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를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피란민들은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이북에서 신앙생활한 교인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레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들은 흩어진 피란민들이 가족을 찾고 모이는 장소가 됐다.

6.25 동란으로 남하한 성도 26명이 1951년 12월 영도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영도교회를 세웠다. 이응만 장로와 오기병 장로를 중심으로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고향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세워진 피란민 교회는 마을 주민들에게 교육과 문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1952년 1월 6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며 시작한 서북교회(현 동광교회)는 52년 4월 큰 목조건물로 이동해 아이들을 품었다.

그 건물에서 1953년 8월 10일 열린 제1회 서북교회 하기 아동성경학교 사진을 건넨 김명화 권사는 "아이들에게 노는 놀이터가 교회 밖에 없어 항상 애들이 바글바글했다"며, "당시 정보는 교회로 모였고 배우는 것 노는 것 모두 교회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피란민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서북교회의 교인들은 국제시장에서 장사해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해서, 3달만에 천막집들 사이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튼튼한 목조건물을 세웠다. 그로부터 5년 후 당시 500만 환으로 296평을 매입하며, 현 동광교회의 건물을 지었다.

교회를 위해 모든 교인이 물심양면으로 참여한 결과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동광교회 김원남 장로는 교회 건축을 회상하며 "지금 주차장을 학생들이 파서 가마니로 날랐다"며, "그때는 깡통 잘라 만든 집도 좋은 집에 속했으니, 교회 는 굉장히 좋은 장소였다"고 말했다.

영도교회도 이응만 오기병 장로를 중심으로 피란민들이 연합해 성장했다. 이응만 장로의 아들 이대운 장로는 "아버지는 항상 집안의 필요보다 교회를 우선시했다. 1959년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었을 때도 집 수리보다 교회 수리를 먼저 했다"며, "그때는 학생이여서 교회가 뜨거운지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성도들이 초대교회 같은 열심으로 헌신해 교회가 세워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피란민들의 삶이자 터전이었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당시 영도교회 당회록에 그대로 드러난다. "오호라! 신의 오묘하심이여, 불행 중 모세를 담은 노(갈대)상자 같이 환란 중에 영도 성중을 비추는 산상의 성은 복음의 서광을 비추게 되었으니, 신이여 영도의 죄악을 하감하시고 영도재단의 애원을 응낙하사 주의 나라를 성취케 하소서. 성령의 능력이 함께 도우실지어다, 아멘. 1955년 5월 5일."



#2 본보에 남아 있는 피란민 교회의 흔적
열정, 한국교회 상징으로 자리매김


전쟁 초기엔 북한 지역 교회와 목회자들의 피해가 컸다. 본보 1983년 11월 26일자에 기록된 6.25전쟁 전 황해도 봉산구의 계동교회에서 남편 기주복 목사와 사역한 김금화 여사의 간증을 보면 "1950년 6월 24일, 전쟁 발발 전날 밤 느닷없이 공산당이 들이닥쳐 남편을 연행했으며 처형했다"는 간증이 나온다. 비단 이 교회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 1946년 11월 3일이 북한괴뢰 정권수립 선거일로 정해졌는데 이날은 주일이었다. 북한 기독교 5도 연합회는 평양에 모여 주일성수를 결의했고, 끝내 선거에 불참했다. 이어 공산당은 목회자들의 집을 습격해 행패를 부렸다.

1953년 10월 19일자에 실린 김관규 목사(당시 서울 마포교회)의 설교에선 비탄에 빠진 북한 주민들과 피란민 교회를 초상집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이들을 꺼리거나 해산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에 어긋남을 강조한다. 많은 피란민 교회가 남한에 세워지면서 기존 교회와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들은 20~30명만 모이면 교회를 세웠고, 교회에 모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남한도 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임시수도로 정해진 부산에 교회와 학교의 이전이 집중됐다. 가족과 재산을 잃은 피란민들은 교회에서 상처를 치유했으며, 아이들은 배움을 계속했다.

1950년대 초반 부산에 15개 이상의 피란민교회가 세워졌다. 본보 1952년 11월 24일자는 부산에서 열린 성경구락부 모임을 소개하며 '15개 피란민교회에 1000명의 학생과 40여 명의 선생이 이 운동에 전심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피란민교회는 구제와 위문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51년 6월 부산 시내에 피란민 교회의 효시격인 평양교회(현 합동측 대청교회, 김세진 목사)가 세워졌다. 교인들은 천막이나 판자집에 살면서도 "예배당만은 멋지게 잘 지어보자"고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선 성전이 먼저 준비돼야 한다는 생각에 아낌없이 헌금을 드렸다.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은 노력이라도 바치겠다고 나섰으며, 남성 교인들이 산중턱의 대지까지 자재를 운반하고, 여성 교우들은 식수와 음식을 운반했다.

그해 12월엔 영도구 대교동에 영도교회가 문을 열었다. 영도교회는 계속 월남한 목회자가 담임을 맡다가 1968년 남한 출신 김호일 목사가 담임을 맡게 된다.

1952년엔 많은 교회들이 신설됐다.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영락교회(한경직 목사), 창신교회(현 동신교회, 권연호 목사), 성도교회(황은균 목사), 용산교회(유호준 목사) 등이 설립됐고, 월남한 피란민들에 의해 영주교회(계창주 목사), 서북교회(이숙경 목사), 평북교회(김용진 목사), 서문밖교회(이광수 목사), 서북교회(현 동광교회, 이순경 목사), 북성교회(김현준 목사) 등이 설립됐다.

피란민 교회들은 더욱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봤다. 부산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고 자리를 잡는 동안 피란민들의 삶도 점차 안정됐다. 이듬해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선포되면서, 부산의 신도들은 남한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부산에서 가졌던 뜨거운 신앙은 한국교회의 상징이 됐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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