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정신, 다음세대로 이어간다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3월 24일(화) 16:38 가+가-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③ 아픔 겪은 교회·사람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만 남은 철원교회 건물. 뒷쪽으로 2013년 세워진 새 건물의 십자가탑이 보인다.

염산교회 77인 순교자 합장묘.
#1 교회에 흐르는 순교자의 피
전국 2000여 교회 잿더미로 변해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크고 작은 예배당을 무참히 파괴했다. 평양에 있던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산정현교회, 남산현교회 등 70여 개의 교회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2000여 교회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후 재건된 수많은 교회 중 순교 정신이 깃든 교회는 한국전쟁 70년을 맞이한 이 순간도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 민족 사랑과 교회 사랑의 거룩한 순교 역사를 계승하며 한국교회 다음세대까지 그 순교신앙의 전통을 전수하고 있다.

●야월교회, 교인 전원 순교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찾아 한국전쟁의 아픔을 생각해 보는 야월교회.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위치한 교회는 민족의 아픔인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교회로 손꼽힌다. 1908년 4월 5일 설립됐고, 성도 65명이 순교했다. 교회 예배당을 비롯해 교인들 주택 전체도 전소됐다. 당시 북한군은 전 교인을 불러 예배당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잔혹하게 학살했다. 당시 피신한 성도까지 자진해 순교를 선택함으로 야월교회는 성도 전원이 순교하는 교회가 됐다.

교회 관계자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선조들의 순교신앙은 지역과 교회 공동체에 영적 신앙적 기둥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노회는 야월교회 순교자 65명의 정신을 기리고자 1990년 순교기념탑을 세웠고, 2009년 7월 선조들의 순교신앙 계승을 목적으로 순교기념관도 건립했다.

●염산교회, 77명 수장돼

야월교회 인근에 있는 염산교회는 전쟁 중에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 됐다. 북한군은 예배당을 빼앗아 사무실로 활용하고, 예배도 드리지 못하게 했다. 당시 담임목사는 사택까지 빼앗겨 길거리로 내쫓겼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 심방을 하며 목양일념에 집중했다. 1950년 8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은 염산교회에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고, 성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또 교회 앞바다에 성도와 청년들의 목에 큰 돌을 매단 채 수장 시켜 성도 77명이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복원된 염산교회에는 '수장 돌' 등 순교 역사 자료를 전시하며 순교 신앙 계승에 힘 쓰고 있다.

●병촌성결교회, 66명 매장

병촌성결교회는 충남 논산에 위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순교사적지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1933년 설립돼 일제신사참배를 거부해 박해를 받다가 1943년 폐쇄 후 매각됐다. 교회 재건 후 성장했지만, 한국전쟁 후 또다시 아픔을 겪었다. 당시 북한군은 교회 성도 66명을 죽이고 같은 곳에 매장했다. 이때 예배당도 전소되면서 모든 성도들이 흩어졌지만 시간이 지난 1956년 교회를 새롭게 건축해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교회는 순교자 66명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상 2층 시설의 '순교 및 안보기념관'을 설립해 순교 역사와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전시 중이다.

●철원교회, 폭격으로 파괴

한국전쟁 전 1945년 강원도 철원 지역은 북한군과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철원제일교회는 공산치하에서 기독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반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된 곳이다. 한국전쟁 후엔 북한군에 의해 예배당이 폐쇄됐고, 북한군 시설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예배당을 북한군 시설로 인지한 미군의 폭격으로 교회는 끝내 파괴됐다. 현재 당시 예배당 전면 출입구 등 건물 일부가 남아있지만, 건물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가치를 인정 받아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됐다. 교회는 2013년 철원제일교회로 건축 복원돼 기념예배를 드렸다.

●두암교회, 주민들도 희생

전북 정읍 두암마을에 위치한 두암교회는 교회 성도 23명이 순교한 집단 순교지이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 예배당을 두고 북한군과 반공 세력 간의 총격전이 수 차례 발생한 곳으로 알려졌다. 북한군은 교회 성도들에게 예배 중지 명령을 내리고, 위협하며 끝내 학살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까지 무참히 살해하며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또 예배당을 비롯해 성도 집 4채에 짚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당시 전소된 예배당 터에는 새로운 예배당이 세워졌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당시 순교한 23명의 성도들을 기리는 순교탑을 세웠다.

●금산교회, 마을 전체 불타

한국전쟁 당시 금산교회가 위치한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는 불바다가 됐다. 마을 모든 시설이 불타 전소됐지만, ㄱ자 예배당으로 보존되고 있는 금산교회만은 불타지 않아 100년을 뛰어넘는 교회사를 간직하게 됐다. 1905년 설립된 교회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돼 지금까지 잘 보존 중이다. 현재도 처음 세워진 그 예배당에서 매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임성국 기자



평양신학교에서 강의 중인 남궁혁 목사(1934년).
#2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내 눈 앞에서 성전을 침범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해도, 자꾸 기억해 내 교훈을 삼아야 할 역사들이 있다. 그 역사 속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선배 신앙인들이 무수히 있었고,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그들을 반추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6.25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하기도 하고 납북되기도 했다.

"너희가 나를 죽일 수는 있으나 내 눈앞에서 성전을 침범할 수는 없다"

6.25 전쟁이 벌어지자 서울에 잔류해 교회를 지키던 새문안교회 김영주 목사는 교회에서 선전용 연극 공연을 하겠다며 총으로 위협하는 공산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날 공산군들은 그대로 돌아갔으나, 8월 18일 다시 김 목사를 찾아와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강제로 북으로 납치해 갔다. 이때 김 목사와 함께 교회를 지키던 주봉영 등 청년 서너명도 함께 피랍됐다.

신당중앙교회 안길선 목사도 피난을 가지 못한 환자 교인을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붙들렸다. 공산당에 협조하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순교를 각오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 해 8월 23일 오전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납치돼 끌려갔다.

서소문교회 김동철 목사, 해방교회 허은 목사, 잔다리교회(지금의 서교동교회)의 주재명 목사와 방서창·염윤의 전도사 등도 당시 교회를 지키다 납북된 인물들이다.

6.25는 신학계의 거목들도 사라지게 했다.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신학연구지 '신학지남'의 편집 책임을 맡았던 남궁혁 목사(제21회 총회장)도 6.25 때 납북됐다. 그는 해방후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의 전신) 총무직을 수행하던 중 전쟁이 일어난 지 두달만 인 8월 23일 장로로 자처하는 박 모 씨에게 붙들려 끌려갔다. 교회 지도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남궁혁 목사를 북한이 대남 방송에 이용하려고 끌고 갔다고 알려진다. 당시 그의 나이 69세였다.

장병욱 씨가 쓴 '6.25 공산남침과 교회'에는 남궁혁 목사의 납북 이후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남 목사는 평양 군무리, 영변 등 북한 여러 지역을 거쳐 1956년 일종의 강제노동수용소인 양강도 자성의 한 목재사무실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종적이 끊겼다고 전했다.

옥고를 치를 만큼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남궁혁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해 중국에서 잠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1949년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아시아 기독교 반공대회에 참석해 부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산당의 회유와 고문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요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자유주의, 독재주의, 최신식 방향전환주의 등 별 가지 주의와 사상의 탁류가 흐르는 사회에서 먼저 우리는 기독교 입장에서 철저한 이론을 세워…실제생활로써 사회생활을 지도하는 사회의 양심이 되어서야 하겠습니다."

'오늘 조선교회의 사명'이란 글에서 이같이 피력한 송창근 목사도 6.25때 납북됐다. 일제하에서 세 번을 투옥했지만 이후 행적이 '친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송창근 목사는 민족주의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송창근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이남에서 조선신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조선신학교 학장 재직 시절 납북됐다.

이외에도 본보의 전신인 기독공보의 주필 김유연 목사, 감리교 초대 총리사(현 감독회장) 양주삼 목사, 성결교신학교교장 이건 목사 등을 비롯해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납치돼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수진 기자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