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70년, 다음세대에 복음과 평화 전하자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1월 19일(일) 10:12 가+가-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 ①기획을 시작하며

파주 임진각에 전시돼 있는 증기기관차. 6.25전쟁중공격을받아장단역에 멈춰선 것을 임진각에 옮겨 놓았다.

올해는 6.25 전쟁 70년을 맞는다. 한반도에 이념 갈등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이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기대하지만 우리의 주변 정세를 보면, 우리의 기대만큼 쉽지 풀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본보는 한반도의 평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인식하고 한국교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기 위한 기획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본보는 한 해 동안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라는 주제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틀을 가지고 6.25전쟁 70년 기획을 진행할 예정이다.



6.25전쟁이 남긴 아픈 상처

우선,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6.25 전쟁이 남긴 상흔을 소개하며 전쟁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찾아온 6.25 전쟁은 우리 민족에 고통과 아픔을 안겨준 역사였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벌였던 6.25 전쟁은 수많은 인명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역사를 경험해야만 했다. 전쟁으로 파손된 남북한교회의 피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로교 541개 교회, 감리교 239개 교회, 성결교 106개 교회, 구세군 4영문 등이 파손됐으며 순교하거나 납치당한 교역자들도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에 이른다. 1952년 6월 20일 WCC에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남한 지역 973개 교회가 소실 및 파괴됐고 교역자 997명이 공산군에 체포됐으며 교인 889명이 교전으로 희생됐다. 남한교회 순교자 중 80% 이상이 이 시기에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25 전쟁 당시 북으로 납치된 인물로 남궁혁 송창근 박현명 김영주 목사 등 2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전남 영광에 있던 염산교회는 김방호 목사 가족 8명 중 7명이 총살당하고 교인 77명이 함께 순교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교인들 중에는 죽창에 찔려 불타는 교회 앞에서 순교 당하는가 하면 새끼줄에 굴비처럼 묶여 돌멩이를 매단 체 교회 옆 바다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당시 기록에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찬송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 65명이 순교하는 동족상잔의 가장 아픈 상처를 가진 교회였다. 공산당 앞에서 한 마디만 신앙을 거부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신앙을 사수하다가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다 속에 끌려가 밀물이 들어올 때 모두 익사했다. 그 중에 한자 몰래 빠져나왔던 한 성도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에 자수하고 이튿날 마지막으로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 이렇듯 야월교회는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한 한국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였다.

올해는 6.25 전쟁이 남긴 아픈 역사 속에서도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용서해주고 양아들 삼았던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으로 폭도들에 의해 동인·동신 두 아들을 잃었던 손양원 목사는 오히려 가해자들의 구명을 탄원해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6·25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북한 공산당에 의해 전재산을 빼앗기고 남으로 피란을 내려왔던 기독교인들은 1946년 서울에서 극우 반공단체인 '서북청년회'를 결성해 공산주의자들을 무조건 공격하는 등 아픈 역사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들은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했으며 제주도 4.3항쟁 당시에도 공산주의자를 공격하는 일을 주도했다. 사실 한국교회사에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서북청년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6.25 전쟁의 아픔으로 우군에 의한 오인 사살로 희생되는 양민들도 나타났다. 1950년 7월 23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미군에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남측으로 내려오던 피난민들 중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군이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서 당시 미군은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노근리 경부선 철도 아래와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여 명에게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30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하는 '노근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이념 갈등

6.25 전쟁이 남긴 상흔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오늘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념 갈등을 짚어본다. 해방 이후, 남북한 간의 이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북한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며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그 결과, 교회 지도자들은 6.25 전쟁에 대해 적극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사실 교회는 평화와 복음 보다는 정치적인 이념에 따라 행동했다. 곧 '전쟁의 승리를 통한 통일'을 갈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전 문제에 대해서도 그 입장을 고스란히 드러내줬다. 남한 교회들은 전국에서 정전 반대, 휴전 반대 집회를 열었고 세계교회에 보낸 성명서를 통해 "한반도 통일은 공산주의를 굴복시킴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1946년에 조직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의 입장도 별다르지 않았다. 북한교회는 인민군의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드렸고 평양 및 북한 전 지역에서 개최된 궐기대회를 통해 전국의 교인들에게 승리를 위한 예배와 기도를 호소하며 북의 전승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심지어 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기 대금 헌납운동도 전개했다. 이처럼 전쟁을 통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입장은 남한교회와 북한교회가 서로 다르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 6.25 전쟁이라는 용어를 두고도 서로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다. '6.25 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 전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두고 진보와 보수간의 시각이 다르다. 전쟁이 발발한 시점으로 보는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한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1945년 해방 이후 일부 시기를 전쟁 기간에 포함시켜 좌우대립의 내란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처럼 해방 정국 초기부터 시작된 좌우 갈등의 골은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도 이미 한반도 이남은 실질적인 내전상태에 처해 있다고 보는 쪽이 '한국전쟁'으로 보는 시각이다.

지금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하며 진보와 보수가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며 갈등을 빚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념의 추종자가 될 수 없다.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따르는 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이념을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코 이념을 기준 삼아 기독교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제 '휴전'에서 '평화'로

세 번째 틀에서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노력해온 평화운동을 살펴보고 향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역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 한반도는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포괄적인 평화 선언이 요청된다. 물론 한국교회는 지난 30년간 일본 도잔소 남북교회 만남을 기점으로 평화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을 쏟아왔다. 그럼에도 대부분 선언으로만 그치고 신앙화와 대중화하는 작업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전'을 '종전'으로 바꾸는 역할이 필요하다. 전쟁과 분단의 현 상황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절대로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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