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랑'으로 '시대의 아픔' 치유했다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7월 01일(수) 09:20 가+가-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 ⑥전쟁 중 순교한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에 애양원에 부임했다. 애양원 입구에 선 손양원 목사./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제공

장남 동인과 함께한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제공
장례식 중 상주복을 입은 안재선(우측에서 두번째)과 가족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제공
애양원교회는 손양원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손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 교회의 모습으로 출입구의 돌계단을 복원했다. 동 교회 송영오 장로가 관련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1. 순교 70주년에 돌아보는 손양원 목사의 삶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용서 실천


70년 전 6.25 한국전쟁 시절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의 적이 돼 극심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박해와 시련 속에 맺은 순교의 열매들은 지금도 후세에 기도로 호흡하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는 순교의 신앙을 전한다. 그 가운데서도 일제강점기와 공산주의의 박해를 당하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순교정신은 코로나19로 자칫 해이해졌을지 모를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해 여천역에서는 20여 분, 여수공항에서는 10분 거리에 자리한 애양원이지만, 1925년 광주에서 여수로 옮겨오던 당시 이곳은 바닷가 버려진 땅 위에 세워진 척박한 곳이었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나환자들이 이곳에서 자활촌을 이루며 정착했고, 지금은 도성래(Stanley C. Topple)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도성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안에는 손양원 목사의 호를 따라 '산돌길'이라 이름 붙여진 길들이 뻗어있다. 누구든지 이곳을 찾을 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들과 손 목사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라는 듯이.

손양원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9년 한창 더운 계절인 7월에 애양원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로 5년여 간 옥살이를 했고, 8.15 해방으로 석방되면서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나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목양한 일화들은 수없이 많다. 경증의 나환자들도 들어가길 두려워했던 중환자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복음을 전한 일부터, 공산군을 피해 모두가 부산지방으로 피란갈 때 나환자들과 교회를 버릴 수 없다며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남아 양떼 곁을 지킨 일 등 그의 삶은 매 순간순간이 순교를 각오한 삶이었다.

그렇게 남아 나환자와 교회를 지키던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13일 인민군에 끌려가 여수경찰서에 유치됐다가, 15일 후 여수에서 순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던 미평과수원에서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숨을 거둘 때까지도 자신에게 총을 쏜 인민군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그는 그렇게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여순사건 때 동인·동신 두 아들을 좌익계 학생의 손에 잃은 지 2년 만의 일이다.

손 목사의 삶은 사랑과 용서의 실천으로 가득했다. 두 아들이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후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각계에 탄원을 요청해 구명해 내고, 그가 풀려나자 양자 삼은 일은 그가 사랑의 성자로 추앙받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지난 주일까지 성가대원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던 두 아들이 죽음이 되어 앞에 왔을 때 부모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하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는 그의 사랑의 깊이는 상상조차 어렵다.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앉았던 식탁에 그들을 죽인 재선을 앉히고 조반을 먹을 때 내 입안에는 밥이 아니라 모래알이 삼켜진 듯 했다"고 고백한 손 목사의 인간적인 고뇌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의 원수사랑 실천은 안재선에게 새 삶을 선사했고 안재선의 아들이 목사가 되게 했으며, 양손자인 안경선 목사가 브룬디의 한센병 환우들을 돕기 위한 NGO'손사랑브릿지'를 조직하게 하는 사랑의 걸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손양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는 "시대의 아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손양원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라며, "손 목사님이 가르쳐주고 몸소 실천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예수님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고 말했던 것을 그대로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삶이야 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자성케하는 것이다.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애양원교회.
지난 5월에 재개관한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손 목사가 11년간 목회했던 여수노회 애양원교회(임용한 목사 시무)는 손양원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올해 3월 교회 건물의 외관을 손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 그대로 복원했다. 1979년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설치했던 것을 측면으로 옮기고 원래 출입구를 복원해 돌계단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애양원교회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제32호)이기도 하다.

임용한 목사는 "손양원 목사님이 애양원에 베풀어주신 사랑의 의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애양원교회는 손양원 목사님의 정신을 따라 한센인 선교뿐 아니라 공산권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와 1k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건립한 이 기념관은 한 때 유가족과의 갈등으로 폐쇄되기도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휴관기간을 거쳐 지난 5월부터 재개관돼 지금은 그 안에서 손 목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개관된 지 27년이 지나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이 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유족 중 막내아들인 손동길 목사도 그곳에서 손양원 목사 가정의 역사를 안내하는 중이다. 이에 대해 임 목사는 "풀어야 할 여러 난제들이 많지만, 손 목사님의 사랑과 용서, 화해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갈등을 법대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며, "유족 중 한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은 사랑으로 품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양측이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기도 중"이라고 말했다.

"나 예수 중독자가 돼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인해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을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되게 하지 말자."

가는 곳곳마다 먼저 간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의 순교정신을 따라가자고 설교하던 손양원 목사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다 순교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믿음의 발자취는 예수님의 사랑을 빚진 우리도 따라 걸어가야 할 길임에 틀림없다.
이수진 기자

순교기념관을 나와 왼편 오르막길을 오르면 손양원 목사 부부와 그의 두 아들이 있는 안장돼 있는 3부자 묘소를 만날 수 있다.


#2. 평생 변하지 않은 신앙의 절개
첫 사역부터 마지막까지 한센병자 섬겨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한 손양원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주일성수 등 기도와 신앙생활에 힘썼다. 1916년 3학년 시절, 손양원은 명치 천황에게 요배해야 한다는 강요에 맞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후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에 갇힌 절개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부각됐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마친 손양원은 1926년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600명의 한센병자들을 섬겼다. 첫 사역지가 한센병자를 섬기는 일이었고, 그는 마지막까지도 한센병환자와 운명을 함께 했다.

1935년 33세의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당시, 한국교회는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참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도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강력히 반대했다. 1939년 여수 애양원교회로 부임한 손 목사는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참담해했다. 손 목사는 설교 때마다 신사참배 반대를 외쳤고, 그가 가는 곳마다 신사참배에 대한 부당성을 외쳐 회개의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러던 중 1940년 손 목사는 여수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들에 의해 연행되고 신사참배 거부와 백성 선동의 이유로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광주형무소, 경성구금소, 청주구금소 등으로 옮겨 다니며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제에 강한 저항정신 외에도 손양원 목사는 가장 약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사역으로 유명하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순교할 때까지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흉측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는 중환자들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주며, 그곳에서 환자들과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병자들에게도 언행이 일치된 사랑을 실천하자, 환자들은 소망을 갖게 되고 기쁜 찬송을 부르는 깊은 신앙을 갖게 됐다.

이렇게 한센병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중 여순사건이 터진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은 평소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했기에 표적이 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됐고,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 목사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후 형제를 죽인 사람 중 하나인 안재선이 총살당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안재선의 석방을 간청하고, 석방된 안재선을 손재선이라고 부르며 아들로 삼았다. 손재선은 고려성경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전도사로 활동하게 된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손 목사는 1000명의 성도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피난을 가지 않았고, 9월 13일 체포되어 28일 밤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해 순교했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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