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평화의 길 열어가자"
[ 연중기획 ]
작성 : 2020년 04월 21일(화) 15:37 가+가-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에서 평화로 ④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의 상처 치유를 위해 마련된 순례 프로그램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는 참가자들.

4.3 희생자 행방불명인 표석.
#1 아직도 남아 있는 반목
"과오 직면하고, 적대의 틀 벗어나야"


2018년 3월 30일. 제주 성안교회(류정길 목사)에서 '4.3 70주년 치유와 회복을 위한 연합예배'가 열렸다. 이날의 예배는 제주 교계가 연합해 4.3 사건을 정면으로 마주한 첫 번째 행사였다. 70년 만이다. 그동안 교단의 일부 목회자들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연합예배를 지속적으로 제안했지만 제주 4.3사건에 대한 상반된 시각으로 논란이 거듭되면서,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 목회자들이 뜻을 모아 70년만에 첫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사망했다.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도 컸다. 제주기독교100년사는 당시 노회장이었던 강문호 목사는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회집한 제35회 총회에서 "제주도는 개벽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졌다"면서 양민 1512명, 가옥 3만4611동이 소실됐고 … 이도종 목사와 허성재 장로의 실종과 살해 소식 등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왜 피해자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에 침묵해야 했을까?

일부에서는 4.3사건에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제주도민 학살에 적극 동참했던 서북청년단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와 목회자, 그리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당시 지도자들이 그들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증언과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또 한편에서는 기독교와 서북청년단의 관계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하고 정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교회가 이념과 갈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좌와 우의 편가르기에서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 형제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다.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했고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 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했다'고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한 바 있다.

제주 성안교회 류정길 목사는 "정치적인 입장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좌우가 분열될 수밖에 없다"면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한 모든 이들이 피해자다. 모두 거대한 역사의 격변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들인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류 목사는 "지금도 제주에 유족들이 남아있다. 교회가 더 이상 4.3을 외면하지 말고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예배를 통해 그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따지지 말고 오직 도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제주 4.3사건 제72주년 추모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면서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그 길이 교회가 걸어나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좌우의 극렬한 대립이 낳은 참혹한 비극을 조건없는 화해와 용서로 이뤄내는 것. 그래서 한반도 평화와 공존, 일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향하게 하는 것. 하나님은 화해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최은숙 기자



#2 4.3의 상처 치유와 제주 선교
"진정한 화해, 복음 통해서만 가능"


"교회는 이념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 신앙으로 제주도민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제주 4.3 사건 발생 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피해자 유가족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과 입장 차이는 크다. 무자비한 집단 학살이라는 상처 속엔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인식하는 이념 분쟁이 더해져 씻을 수 없는 갈등으로 존재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존이 제주 현대사이지만, 4.3의 화해와 상생을 위한 복음적 방향에 뜻을 같이하면서도 엉킨 문제를 풀어야 할 오래 된 숙제의 답을 찾기는 여전히 어렵다.

피해자들은 한국교회가 과거 냉전 구조의 아픔을 끌어안고 화해와 상생의 길로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더 이상 제주 4.3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결국 '이념'이'복음'을 앞서선 안 된다는 것이 '제주 4.3'을 향한 등진 제주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었다.

제주 4.3 사건 유가족의 평신도 모임인 '치유와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 대표 오승학 집사(제주성안교회)는 제주 4.3의 화해와 상생을 소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주 4.3의 치유는 곧 제주선교'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 4.3 추모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의미도 있지만, 가족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온 유족들을 위로하는데 의미가 있다"며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던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성경 비유처럼 한국교회는 4.3 유족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노력해 주시길 바란다. 이념보다 위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으로 제주와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승학 집사는 과거 일부 지도자들이 제주 4.3에 '이념의 족쇄'를 씌웠다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4.3 치유에 대한 교회적 관심이 부족했고, 되레 4.3을 외면했다고 했다. 그것은 제주선교에도 악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 오 집사는 "교회가 제주 4.3 유족에게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설 때, 선교의 불은 더욱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라며 "4.3의 상처는 가슴속에 남아 있지만, 진정한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교회는 낮은 자세로 고통을 나누고, 상처 받은 이웃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에 의해 생매장당한 제주 출신 1호 목사, 이도종 목사의 손자 이동해 장로(제광교회)도 제주 4.3의 화해와 상생을 희망했다. 하지만 4.3에 대한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객관적인 상황에서의 진실 규명이 선제돼야 한다고 했다. 이 장로는 "할아버지는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던 중 군경이 아닌 공산당의 폭동에 의해 살해당하셨다"며 "당시 가해자가 현재 피해자로 혼재돼 있다. 제주 4.3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위해선 과거사가 바르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이 장로는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를 설립했다. 무고하게 희생당한 피해자 유족과 함께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장로는 "4·3 사건 본래 의미가 변질되지 않고,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며 "그것이 제주 4.3의 화해와 상생을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제주 4.3의 역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류승남 목사(신촌교회)도 바른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제주 4.3은 낮에는 군과 경찰, 밤에는 폭도들에 의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한 사건임을 인정하는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며 "제주 4.3의 화해와 상생을 위해선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제주도민 그 누구도 제주 4.3의 화해와 상생을 부정하지 않는다"며 이 일을 위한 교회의 관심을 요청했다.임성국 기자



#3 잊혀져 가는 민족의 비극
"제주의 역사 넘어 대한민국의 아픔"


해방과 정부수립,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시대에, 제주도에서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참사는 1948년 4월 3일 새벽에 봉화를 올리며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인사들을 살상하는 사태로 폭발하였기에 4.3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1947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이 도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데, 이를 빠르게 수습하지 못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전쟁에 버금가는 사태로 전개되고 입산자들을 뜻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1948년에서 다음해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초토화작전이 진행되어, 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난리로 2만에서 3만을 헤아리는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라산 출입이 허용되며, 생존 공비가 없어지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생존자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참혹한 기억에 시달리다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희생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오랫동안 시달렸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새천년에 들어서서야, 공권력의 지나친 권한 행사로 많은 도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단순히 제주인의 아픈 역사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 평가, 위로하는 일은 2018년에야 시작되었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많은 군대와 경찰이 동원되었고, 서청이 가세하였다. 관서, 관북, 서해의 청년단을 아우르는 조직으로 서북청년단이란 명칭이 생겼고, 이를 줄여 서청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월남한 실향민 청년 전체를 가리키는데, 4.3당시 제주도에 와서 행패를 부렸던 사람들은 서청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었다. 군대나 경찰보다 더 무서운 건 서청이었다는 증언은 수없이 나온다.

분단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고통과 상실감은 달리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족들은 희생되었으며, 구사일생 남하한 청년들이 공산주의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보복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제주의 청년들도 피난처를 찾아 군에 입대하였고, 전장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진격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운 용사들이 많이 생겨났다. 같은 틀에서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민족의 비극이었다.

서청의 실체를 파악하여 객관적인 자료를 갖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 중 교회청년들의 몫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몇몇 파편적인 증언은 있지만,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오히려, 가해자의 입장에서 직접 혹은 간접 경험을 가진 목회자들의 증언은 더러 있었다. 그들마저 대부분 별세한 지금, 이를 토대로 사실여부를 논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그 역시 과장되거나 왜곡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서청은 대부분 경찰이나 군대로 변신하여 현지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국가 혹은 정부 아니면 권력자의 입장에서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서 파생되는 폭력성은 정당하다고 승인하고 격려하는 입장을, 개신교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겪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시각에서 교회는 평화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정책을 택하였으며, 아직도 대부분 이런 관점을 유지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있을까?

이러한 환경에서, 제복을 입고 직접 생명을 살상하는 역할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신앙인들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평화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직도 불가능한가?

김인주 목사 / 제주 NCC 총무·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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