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공기, 시대 따라 주어진 역할 감당
[ 창간특집 ]
작성 : 2020년 01월 10일(금) 08:16 가+가-
창간 74주년, 제호를 통해 본 한국기독공보
한국기독공보가 74년의 새해를 맞이했다. 한국기독공보는 해방직후 탄생한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기독교 주간지이다. 민족과 교회의 고난과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언론으로서 한국기독공보는 이 이름의 변천사와 함께 정체성과 역할이 변화되었다.

1. 기독교공보 시대(1946~50)

1945년 7월 19일 한국교회는 일본기독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불과 한 달이 못되어 해방이 되자 교단은 그 이름을 남부대회로 변경하고 1946년 1월 17일에 교단의 기관지로 '기독교공보'를 창간했다. 대회장 김관식 목사는 간행사에서 '기독교공보'는 교회의 하나 됨을 "지표로 향하여 등정(登頂)한 조선기독교회의 전령사(傳令使)이다. 조선교회의 공기(公器)이다"라고 말하며 단일교회의 뜻을 담았다. 그러나 교파 재건이 일어났고, '공보'는 9월 3일에 재건한 '조선기독교연합회'(KNCC)의 기관지가 되었다. 영락교회 김응락 장로의 노력과 사재(私財)를 터는 헌신으로 신문이 운영되었으나 1948년 6월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공보」는 사유화되었다. 그나마 6.25 전쟁 직전에 경기도회에 인수되었고 139호를 발간하고 휴간되었다. '기독교공보'는 신탁통치 반대기도회, 주일총선반대운동을 전개했고, 최초 3.1운동 행사의 좌우 대립, 제헌국회의 기도사건, 국기최경례에 대한 교회의 저항, 성결교회 무교동교회의 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보도했다.

2. 기독공보 시대(1951~1954)

'기독교공보'는 1951년 12월 26일 피난지 부산에서 '기독공보'라는 이름으로 140호가 복간되었다. 기독공보는 전쟁 시기에 부산에서 권연호 목사, 김린서 목사, 황성수 의원, 김형근 집사 등 네 사람에 의해 발간되는 동인지(同人誌)였다. 그러나 박형룡 교수(고문), 황은균 목사(주필), 총회의 중진들이 이사와 고문을 맡고 있어서 이 신문은 총회의 기관지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 이 시기 월남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총회 안에 서북교권이 강화되었고, 특히 박형룡 교수를 중심에 둔 NAE세력이 교권으로 성장했다. 1952년에 고신과의 분열 1953년 조선신학교 측과의 분열을 경험했다. 박형룡 박사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기독공보는 신학적, 정치적으로 반-조선신학교, 반-에큐메니칼, 친-NAE(한국복음주의협의회)적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황성수 의원의 신학서 번역, 김인서 목사의 어린이 공과교재, 박형룡 교수의 과학과 종교가 시리즈로 연재되었다. 195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와 부통령 후보 이윤영 목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하였다.

3. 총회 기관지로서 기독공보 시대(1954~1966)

'기독공보'는 1953년 9월 서울로 상경하여 종로 2가 대한기독교서회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장로교총회, 미북장로회, 대한기독교서회, 성서공회, 조선기독교연합회(KNCC), 한국기독학생연맹(KSCF)이 모여 있는 중심지였다. 제38회~제40회 총회 시기(1953~1955)에 예장 총회의 에큐메니칼 지도력이 임원으로 부상했고, 그 반대로 제41회~제42회 총회 시기(1956~1957)에 NAE계의 노진현, 정규오, 박찬목, 박찬목 등이 임원으로 부상했다. 총회 안에서는 에큐메니칼 찬반논쟁이 일어났다. 1958년의 제43회 총회에서는 NAE계가 회계를 제외한 모든 임원을 차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1959년에 교단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에큐메니칼계 지도자들은 기독공보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신학논쟁을 허용하면서 극단을 배제하는 균형을 잡아주었다. 이것이 향후 통합 측의 신학정체성을 결정하게 되었다. 1953년 안광국 총무는 총회가 '기독공보'를 총회 기관지로 인수하도록 제안했고, 1954년의 제38회 총회(이원영 총회장, 한경직 부총회장, 안광국 총무-훗날 통합 측 지도자들)은 미북장로회에서 8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서 신문사를 인수했다. 이로써 '기독공보'는 8년 만에 공교회 기관지의 성격을 회복했다. 기독공보는 그 해 총회야간신학교 설립(훗날 서울장신대학교), 신사참배 결정의 취소와 회개운동, 박태선 전도관 집단에 대한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기독공보 1954년 10월 16일자 290호부터는 고문 박형룡, 사장 권연호, 부사장 황성수, 편집주간 김인서 등 기독공보 임원진의 명단이 사라졌다. 그 대신 발행인은 이원영 목사(1955. 1~1957. 5)와 전필순 목사(1957. 5~1963. 12)가 맡았고, 사장은 한경직 목사(1955. 10~1957. 10)가 맡았고, 편집국장 채기은 목사가 사임한 1959년 10월 이후에 유호준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1955년 40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된 한경직 목사는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의 자격으로 빌리그래함을 초청하여 대규모 전도 집회를 개최했다. 이것은 전후의 분열된 한국교회를 단합시키고 전도관과 통일교의 사설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교계 분파주의를 극복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4. 한국기독공보 시대(1970~현재)

기독공보는 1966년 9월 24일자 제848호를 발간하고 갑자기 중단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 7월 31일 문화공보부의 허락을 받아 '한국기독공보'의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한국기독공보가 역사 속에서 지켜온 정체성과 역할을 살펴볼 때, 한국교회의 공기(公器)로서 예언자적 정론(正論)을 펼쳐가고, 이단 사상을 예리하게 걸러내고, 폭넓으면서도 열정이 있는 교단의 복음주의-에큐메니칼 신학사상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늘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언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병준 교수 / 서울장신대학교·한국장로교역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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