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4역, 배곯으며 편집
[ 창간특집 ]
작성 : 2020년 01월 10일(금) 08:21 가+가-
전란에도 인쇄는 계속됐다
6.25 전란 중에도 기독공보는 쉬지 않고 계속 발행을 이어갔다. 전쟁의 혼란과 함께 중단됐다가 부산 피란지로 옮겨 가서도 신문 발행은 지속됐다.

당시 주필인 황은균 목사는 1951년 12월 부산서 속간한 이후 쉬지 않고 발행한 것을 치하하며, 지령 200호 기념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간 신문 이백호!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당시 발행되던 80여 종 출간물 중에 기독공보가 가장 우수하다고 공보처에서 증언한다"(1953년 1월 12일 자 칼럼 중에서).

1953년 1월 부산국제시장의 대 화재로 기독공보의 임시 사옥도 전소됐다. 1961년 9월 4일자 '기독공보 15년 소사'에는 "불의의 부산국제시장 대화재로 소강상태에 들었던 본사도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으니 충천하는 불길에 본사 임시사무소도 전소의 운명에 김형근씨 등 사원은 서류 꺼내기에 노력했으나 그러나 좁은 길목이 미어짐으로 멀리서 불길만 바라다 보다"라고 정리돼 있다.

전쟁 통에 어렵게 마련한 임시 사옥마저 불타고, 인쇄공장을 보유하지 못해 발간일이 종종 늦어지긴 했지만 기독공보는 조력자들의 도움과 직원들의 숨은 노력으로 피란지에서도 중단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이미 재정 때문에 정간한 전력이 있기도 했고, 창간된 지 10년 반 동안 기독공보의 경영자가 'NCC→김응락→도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총회종교교육부→김형근→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등으로 여섯 번이나 바뀌었으니 피란시절 신문을 발행하던 어려움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듯하다.

지령 300호 기념호인 1954년 12월 27일자에서 김경래 기자(후에 경향신문사 편집국장 지냄)는 주간신문의 발행의 어려움에 대해 이같이 표현했다.

"주간물인 기독공보는 정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속간 이래 한번도 쉬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등록발행한다는 주간신문치고 한호도 빼지 않고 연달아 나온 신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것만 봐도 주간신문하기 힘든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또한 그는 공장관계로 날짜마저 제대로 못나오는 것과 인원부족으로 1인 3역 4역까지 하고 있다고 토로하며, "일간신문처럼 정기적인 통신과 2,30명 기자가 한꺼번에 써내어 몇 시간 만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한 두 사람이 전담하기 때문에 때로는 밤을 새워 일해야 하고 또한 공장이 직영이 아니기에 여러 가지 오자(誤字)가 있어도 다음일에 재촉받아 끝까지 책임 있게 돌보아 주지 않는 점 등 공장시설 없는 설움이 크다"고 말했다.

그 시절의 어려움을 김관호 목사(종교교육부 간사, 서울 명수대교회 목사)는 1957년 1월 14일(400호 기념)자 '배곯으며 편집'이란 제목의 회고기(回顧記)에 상세하게 적어놨다.

"나는 부산에서 한 一년동안 편집국장일을 했다. 그 때는 피난생활 중이라 모두 슬픈 생채기를 지닌 때였다. 유일의 소망과 위로를 하늘나라에 두고 교회마다 사람들이 넘치던 때 새벽제단마다 눈물바다로 화하던 때였다"고 회상한 김 목사는 고소한다고 협박하며 기사 정정을 강요하는 일, 집필한 칼럼으로 인해 집사들로부터 테러 위협을 당했던 일 등 다양한 여러 일 가운데서도 부산서의 잊지 못할 일은 '배고프던 일'이라고 적어놨다.

당시 월급은 겨우 쌀이나 살 정도였다. 점심은 생각조차 못했고 전차비도 없어 늘 걸어만 다녔던 시절, 그는 감사절 날 뜻하지 않았던 쌀 한가마의 선물이 일생 '잊지 못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날 공보사에서 과자 한봉지씩 주는 것도 편집국장 차례에는 안돌아갔다. 그만큼 신문이 가난하던 모양이다. 해방 후 공보처에 일할 때 먹고 살길이 없어 '물과 공기만 먹고 사는 법을 배워가지고 다시 와서 일하마'라고 일지에 써놓고 나온 기억이 새로운데 기독공보사 편집국장도 더 계속할 기력이 없어 그 배고픈 국장자리를 내어던지고 나와버렸다"

"운영비가 없어 아내의 치맛감을 팔아서까지 무리를 했더니 일생을 두고 아내에게 원망을 면치 못하게 됐다(김형근 씨)"는 회고를 할 만큼 운영실무자나 편집책임자들의 변동이 숱하게 이뤄졌던 시절, 한국기독공보의 선배들은 오직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다음세대를 위해 한줌의 '거름'이 되고자 코피를 쏟는 고달픔 속에서도 발행을 이어왔다. 오직 조국과 모교회(母敎會)의 문화면을 개척하기 위해 이들이 걸었던 험난한 길은 지금도 후배들을 통해 이어져가고 있다.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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