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6.해외입양인 엠마 루네스팡 이야기 하
작성 : 2019년 07월 22일(월) 17:17 가+가-

엠마 루네스팡(우측)과 필자 고무송 목사(좌측).

뿌리의집을 섬기는 사람들. 왼쪽으로부터 김도현 대표, 김길자 이사장, 공정애 원장, 필자.
해외입양인 엠마 루네스팡(Emma Runespang), 그녀가 들고 온 '족보'라는 이름의 신상명세서. 그것은 달랑 A4용지 넉장에 적혀있는 그녀에 관한 인생내력이다.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찌어찌하여 스웨덴 땅까지 흘러 들어가게 됐는지를 밝혀주는 호구조사서 같은 것이요, 어쩌면 경찰조서 같기도 한 것이다. 그녀를 양육했던 '대한사회복지회'가 보유하고 있을 도큐먼트(document) 영어번역물. 원본(原本)이나마 참조하려 했건만, 그마저 입양특례법 제36조 3항에 저촉, 공개불가 판정이 내려져 있어 가까스로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게 되는 부본(副本)인 셈이다.

-성명: 김광희(金光喜)/ 일련번호: 82-1256-KSY/ 작명: 대한사회복지회 사회복지사/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82년 10월 13일/ 출생지: 경상북도 구미.

-아버지 22세, 어머니 18세. 엄마는 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 구미 소재 전기회사에서 현장 실습중 아빠를 만나 교제 중 임신. 아빠는 군에 입대했고, 엄마는 임신을 숨겨오다 부모에게 발각, 예정일 한달 전 출산. 신생아 2.3kg 건강양호. 부모와 합의, 대한사회복지회 경북지부에 입양신청서 제출.


그녀의 신상명세서엔 신생아의 양육과정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엠마의 진술을 듣는다.

-저의 출생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근거로 요만한 기록물이나마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절 받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신 분들의 수고와 사랑을 어찌 다 말로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결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워버릴 수도 있는 생명이었잖아요. 그렇지만 그러질 않았잖아요. 감히 비교도 할 순 없지만,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보다 호사까지 누렸거든요. 이 기록들 좀 보세요.

신상명세서엔 여러 항목에 걸쳐 신생아 김광희의 발육과정이 촘촘히 기록돼 있다. 디피티(DPT), 폴리오(Polio), 비씨지(BCG) 접종, 잠버릇, 용변, 목욕 등등 생장 과정이 날짜순으로 세심하게 기록돼 있음을 본다. 간략하게 간추려진 기록이지만, 가녀린 새생명을 정성 다해 돌봐준 입양기관의 헌신에 삼가 옷깃을 여미게 되는 대목이다. 원본을 볼 수 있다면 더 큰 찬사를 드릴 것이건만, 그게 허용되지 않는다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기필코 해외입양인 인권보호 차원의 법으로 고쳐져야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우유를 달라고 새벽 3~4시경 깨긴하지만, 저녁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곤히 잠든다.

-기저귀가 젖으면 요란하게 울어대지만,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히면 기분 좋게 잠든다.

-잠버릇 고약해서 이불을 걷어차지만, 잠을 깨선 울지 않고 스스로 기지개를 켜곤한다.


뿌리의집이 출판한 서적들.
신생아의 자라남이 이른 봄날 새싹처럼 예쁘고 귀엽기만 하다. 엄마 품에서 자랄 수 있었더라면 아가와 엄마가 얼마나 좋아라 했을 것이었겠는지! 두고두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런 기록도 있다.

-언어구사:아직 옹아리를 잘 할 줄 모르고, 울음소리는 작은 편임/ 운동신경:머리를 똑바로 치켜듬.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함. 목욕시 근육 운동이 감지되며 철벅거리기도 함/ 성품:우아하고 얌전함.

필자는 기록물들을 열람하면서, 비록 알량한 자료이긴 하지만, 새삼 구약성서 시편기자들의 가족 찬양을 깊이깊이 음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가족처럼 소중한 선물이 어디 또 있을까!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편 127:3~5a)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편 128:3~4)


그러기에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은 성서에 바탕을 둔 명문(明文)이라 여겨지며, 모든 이들의 마음에 새겨 둘 명문(銘文)이며, 모법(母法)과 준거법(準據法)이 돼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모든 아동은 출산과 더불어 자신이 태어난 가정에서 양육되고 건전하게 성장할 권리를 가진다.

미혼모들과 삶을 나누고 있는 애란원 강영실 원장의 증언이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옳습니다. 전에는 미혼모들 거의 출산한 신생아들을 포기했지만, 요즘엔 거의 모든 미혼모들이 직접 양육합니다. 저희는 물론이지만, 국가도 이를 적극 지원하고요. 이것이 천륜(天倫) 아니겠는지요.

뿌리의집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뿌리의집 대표 김도현 목사

-그토록 소중한 어린 생명들이 해외입양 현장에선, 뜻밖에도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가 스위스 파송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직접 겪어야 했던 엄청난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 김도현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파송 스위스 선교사로 선발된다. 베른한인교회 담임목사이면서 왕복 5시간의 제네바한인교회를 겸임, 전 유럽대륙을 교구(敎區)로 삼게 된 것이다. 김도현 목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일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입양인들을 돌보는 사역. 민들레처럼 흩뿌려져 국제미아(國際迷兒)로 떠도는 방황하는 코리언 에트랑제(Korean Etranger).

-1993년 6월, 라인강변에서 당시 스물세살의 한국계 스위스 입양인이 투신자살했습니다. '나는 나를 낳아준 친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런 유서가 남겨졌습니다. 그 여인은 양부모의 친아들인 두살 위 오빠한테 오랜 기간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인하여 김도현 목사는 서둘러 9년 동안의 스위스 선교사역을 마감,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다.

-해외입양인 돌봄사역은 나름대로 의미가 컸지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해외입양 문제의 본질을 파악, 아예 초장에 문제점을 막아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됐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버밍함대학교 신학부엔 독일인 선교신학자 우스토프 박사(Prof. Dr. Werner Ustorf)가 평생교수로 초빙돼 분단국 한국 상황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로 몇몇 한국인 제자들을 포용, 필자 역시 그의 지도로 한국 최초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목사 연구로 선교신학논문(PhD)을 집대성했던 것. 김도현 목사 또한 그분의 지도 하에 해외입양을 주제로 선교신학석사(MPhil) 논문을 집대성하게 된다 - '한국 미혼모와 해외입양 문제에 관한 예비신학적 모색(A preliminary theological exploration on the matter of intercultural adoption and Korean birth mothers)'. 어느날, 지도교수 우스토프 박사가 넌지시 건네던 아쉬움. 그 아쉬움을 필자는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다.

-김도현 목사의 논문은 탁월(excellence)합니다. 기필코 박사학위논문(PhD)으로 집대성돼야 합니다.

#뿌리의집으로의 초대

한국해외입양 문제에 관한 마지막 논문과정(PhD)으로 진입하는 찰나, 김도현 목사는 뿌리의집 김길자 이사장으로부터 러브콜(Love Call)을 받는다. 망설였지만, 곧장 결단한다. 학문으로의 집대성도 중요하지만, 입양인을 송출하는 한국에 속히 들어가 해외입양 문제를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사역에 헌신하는 일이 절박한 과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뿌리의집 산고(産苦)를 치렀던 김길자 이사장의 이야기를 다시 경청하게 된다.

-90년대 중반 어느 날로 기억됩니다. 북한동포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일을 위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란 단체를 조직, 공동대표로 봉사할 때였습니다. 마침 미국 LA에서 가졌던 국제대회에서 한국 인입양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교민사회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조국의 품에도 선뜻 안길 수 없는 국제미아(國際迷兒)인 것을 목격, 제가 엄마처럼 품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뿌리의집을 열었던 겁니다. 그런데 맡아줄 분이 마땅찮았어요. 그때 김도현 목사님을 기억하게 됐으며, 즉각적으로 강권하게 됐던 거에요.

김길자와 김도현의 만남, 그것은 필자의 오래된 취재메모로 회귀한다. 경향신문 1988년 6월 23일자 15면 1단 기사. 사회면에 한 줄로 스치는 단신(短信)이었지만, 그 기록이야말로 인간 김도현의 지울 수 없는 '흔적'(stigma)아니겠는가.

-새문안교회(당시 김동익 목사 시무) 대학생회와 청년회는 23일 '새문안교회 주일 경찰 성전 난입 경위와 우리의 주장'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찰폭력 문제의 근본 척결을 위해 24일 하오 7시 새문안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진 후 서대문로타리 치안본부까지 평화행진을 갖기로 했다. 이들은 지난 19일의 경찰 난입사건은 6.10회담 참가 학생들에 대한 강제해산 과정에서 새문안교회 지태환 군(21세, 총신대 2년)을 3층 옥상에서 떠밀어 추락 사망케 한 백골단의 만행에서 비롯됐다고 주장, 이번 평화행진에 경찰폭력 해결과 백골단 해체를 원하는 모든 기독교인과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새문안교회 대학청년부 담당 부목사 김도현. 그는 그때 그 사건에 연루, 새문안교회 당회로부터 의원면직(依願免職) 처분을 받는다. 사표(辭表)를 제출했던 것이다. 잠잠히 자신의 십자가를 메고가는 의연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 아동부 교사로 봉사하던 김길자 평신도 집사. 김길자 이사장과 김도현 대표의 해외입양 문제를 향한 사랑의 대장정(大長征)은 그때 그 시절 그렇게 싹이 튼 것이었다. 찬송하리로다,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攝理; Divine Providence)여!

#"어서 오세요!(Welcome Hom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25-10, 이곳에 해외입양인들의 쉼터 뿌리의집이 있다. 정원이 딸린 반지하 3층 석조 양옥의 아름다운 집은 김길자 이사장(경인여대 명예총장) 가족이 살던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개조, 무상임대로 제공하면서 해외입양인들의 쉼터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저희들이 하는 일은 크게 세가지로, 게스트하우스 운영, 입양 문제에 관한 해결책 모색, 출판사역입니다. 모든 일이 만만찮은 일입니다만, 가장 힘든 일을 아내에게 맡겨놓은 것 같아, 그러잖아도 평생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만, 날이 갈수록 빚이 쌓여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것만 같네요.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했던가? 뿌리의집 대표 김도현 목사와 게스트하우스 원장 공정애 사모가 그렇다. 아내가 작곡을 전공해서 그러할까? 언제나 넉넉하게 화답해 주는 그 아내가 김 목사는 그저 고맙기만 한 것이다.

-힘든 건 맞아요. 1,2층 게스트하우스엔 연중 300여 명 해외입양인들이 머물기 때문에, 날마다 글로벌 페스티벌 잔칫집이니까요. 힘은 들지만 고국이 낯선 해외입양인들에게 안식과 꿈을 제공할 수 있어 보람차고 재미있답니다. 헌신적인 우리 스탭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모아 모든 일을 함께 헤쳐나가기에 우리 뿌리의집은 언제나 즐거운 천국이랍니다 - "어서 오세요! (Welcome home!)"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뿌리의집은 신바람이 났다. 최근 출판한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해외입양의 숨겨진 역사)'-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목하(目下) '장안(長安)의 지가(紙價)'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선미 기획실장의 설명을 경청한다.

-미국 보스턴대학 역사학과 오 교수(Prof. Arisa H. Oh)가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회심작입니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이 어떻게, 왜 시작됐으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현재까지도 진행중인 한국의 '아동수출' 문제에 대한 성찰과 개선책 등을 제시하고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 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은 그동안 저희들이 출판한 책들 모두가 베스트셀러 차트에 올라 있답니다.

김도현 목사 내외가 한정식으로 마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홀로 자하문 고갯길을 휘적휘적 내려가는 엠마 루네스팡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노을 비낀 빈 하늘에 지급전보를 타전했다.

-하나님 아버지, 우아하고 얌전한 대한의 딸 엠마 르네스팡을 꼬옥 품어주시고 한량 없는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글·사진 고무송 목사 /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 · 전 본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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