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2.미국남장로교 순천 선교와 김형재목사
작성 : 2019년 04월 15일(월) 08:29 가+가-

평양숭실대학교 제2회졸업생. 김형재 목사는 오른쪽 위로부터 시계방향 세번째. 가운데 인물은 교장 배위량(裵緯良) 목사 (Rev. Dr. William Martyne Baird, PhD) /사진 숭실110년화보(숭실대학교)

'흔적을 찾아서-배위량 목사의 대구선교 리포트'에 표출된 독자들의 반향(feed back)은 즉각적이고도 뜨거웠다. 23년전 필자가 한국기독공보에 연재했던 '토마스 찾아 삼만리'에 보여졌던 농도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최근 구축된 온-오프라인(On-Off Line) 다중시스템(multi-system)에 의한 속보성(速報性)의 영향으로 파악된다. 크게 주목되는 반향은 남녘으로부터 날아온 순천 트리오 메일이었다.



#미국남장로교 전라도 선교

'흔적을 찾아서' 첫번째 이야기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목사의 대구 선교'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남장로교 호남지역 선교사역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순천드림교회 임화식 목사)/ 독자들로 하여금 미국북장로교 영남지역 선교와 남장로교 호남지역 선교를 비교 검토할 수 있도록 순천지역 선교도 소개해 주시면 여러모로 유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순천동명교회 박정환 목사)/ 한국인 김형재 목사가 선교사로 순천에 파송돼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과 사역했고, 그의 집과 계단에 특별한 사연도 있답니다. '흔적을 찾아서'로 취재해 주세요.(향토사가 순천동부교회 김수웅 장로)
김형재 목사의 생가를 오르내리는 36계단. 허물어진 일본신사의 제단석으로 계단을 만들어서 밟고 오르내리며, 일제 36년의 압제를 되새겼다고 직계손 김준선 교수(순천대)가 증언. /사진 사진작가 김수웅 장로(순천동부교회)
순천 트리오의 제보는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골고루 갖춘 것이었다. 필자는 3월 31일 새벽 행신역발 순천행 KTX 첫차에 몸을 실었다.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는 1892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이눌서)를 비롯한 이른바 '7인의 선발대' 도착으로 비롯된다. 전라북도 전주(1893년)로부터 시작, 군산(1895년)을 거쳐 전라남도로 확장, 나주(1897년), 목포(1898년), 광주(1904년)를 경유, 마침내 순천(1906년)에 이른다. 남북전쟁에서 패퇴한 지역의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과 전봉준의 농민봉기로 외국인의 접근조차 불가했던 불모지(不毛地) 전라도 거민(居民)들과의 만남은 패자부활전 같은 것이요, 그것은 숙명이요,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마침내 전라도 땅을 온통 복음의 불바다로 만든 기폭제(起爆劑)가 된 것이었다.



#나그네 김형재

김형재 목사의 직계손 김준선 교수(순천대 산림자원학)의 증언은 필자의 의표(意表)를 찌른다.

"조부 김형재 목사님이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로 사역했다고들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평양숭실전문학교 출신으로 일본식민통치에 항거, 쫓기는 몸이 되자 미국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유학, 신학을 공부하고 순천에 오셨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어른께선 미국선교사들보다는 주로 동네 이웃들과 어울려 지내셨고, 하모니카로 '켄터키 옛집' 등 망향(望鄕)의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합니다."

'미국남장로회내한선교사편람(1892~1987)'(한남대학교출판부), '내한선교사총람(1884~198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을 포함한 어떤 자료에도 선교사 김형재(金亨哉)의 이름은 등재돼 있지 않다. 1906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순천 매산등(梅山登)에 선교본부를 설치, 교회개척(순천읍교회:1907년)을 비롯, 학원선교(매산학교:1910년), 병원선교(안력산병원:1913년) 활동을 펼쳤다. 그 미국인 선교사들 속에서, 당시로선 보배롭기 그지 없었던 미국 유학파 한국인으로서 미자립 농어촌교회를 섬기며 독야청청(獨也靑靑)했던 인간 김형재의 실루엣(Silhouette). 필자는 불현듯 중학교 시절 즐겨 읊조렸던 청록파(靑綠派) 시인 박목월의 '나그네' 싯귀가 입가에 맴도는 것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전도인 권서(勸書) 독립운동가 김형재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로 순천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는 김형재 목사. 그에 관한 기록이 희귀해 '흔적을 찾아서' 길떠난 필자는 퍼즐맞추기를 하듯 그의 실체를 모자익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먼저 모교 숭실대학교를 찾아 한명근 학예연구사(한국기독교박물관)의 협조로 어렵사리 몇몇 기록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숭실교우회(崇實校友會) 회원명부에 나타난 인적사항은 왜 그가 망향가(望鄕歌)를 불러야 했던가 짐작케 한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정리해 놓은 기록들은 그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젊은 전도인이요 열혈청년 독립운동가였음을 증언한다.
36계단에 얽힌 사연을 필자에게 증언하고 있는 직계손 김준선 교수(사진 왼쪽). /사진 사진작가 김수웅 장로(순천동부교회)


'원적(原籍): 평양부(平壤府)상수리(上需里) 38 / 현주소(現住所): 순천읍(順天邑)매곡리(梅谷里)183 (평양숭실대학 역사자료집VI 숭실교우회 회원명부 p.29)'

'김형재 씨를 단장으로 한 평양숭실학교 음악전도대 일행은 함흥으로부터 지난 4일에 내홍(來洪)하야 하오 8시부터 홍원(洪原)청년구락부 광활한 운동장에서 주악전도(奏樂傳道)하얐는대 청중은 무려 2000여 명에 달한지라… (평양숭실대학역사자료집II 학생활동 p.21 매일신보 1920.7.10.)'

'평양숭실전도대는 지나간 하기방학을 이용하야 순회전도를 하던 중에 불행히 선천폭탄혐의로 선천경찰서에 유치를 당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중략)그 중에 연사 김형재 씨와 조만식 씨는 아직 유치중에 있는데 동씨도 수일간 방면될 터이라더라.(평양숭실대학역사자료집II 학생활동 p.29 매일신보 1920.9.25.)'

젊은날 일제에 쫓기는 '도망자'(Runaway) 되어 고향땅 평양을 떠나 미국에 유학했던 이방나그네 김형재. 1928년, 어쩌다 전라도 순천땅에 들어와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는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조용히 긍휼사역(矜恤事役)을 펼친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 별량 두고리에 교회를 개척했고, 제19회 순천노회장을 역임했으며(1935년), 순천노회 목회자 전원이 구속된 '원탁회사건'(1940년)으로 1년 6개월 징역살이하며 순천구치소와 광주형무소를 전전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후 탁월한 영어실력으로 인해 미 군정청 고문관에 위촉,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공헌했으며,특별히 '여수순천사건' 혼란의 와중에서 수많은 양민을 구출하는 등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돌보며 선각자의 삶을 영위, 1966년 10월 27일 소천했다. 김형재 목사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의 행적이 '기록'으로 보존돼 있지 않고, 다만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고요하고도 은은한 향기로 오래오래 이어지는 긴 여운의 한 평생이었던 것이다.

김형재의 '흔적을 찾아서' 길떠난 필자는 숭실대와 대한성서공회 등 몇몇 공공기관과 연구소들이 수집 정리해 놓은 소중한 기록들을 발굴(excavation)하고 증언자들의 만남(come-across)을 주선하게 되는 중매장이(matchmaker) 역할을 감당한 셈 아니겠는가. 아무튼지 젊은 날 김형재의 면면을 조각 조각 이어붙여 모자익(mosaic) 함으로써 그의 실체를 그려낼 수 있는 초기의 기록들은 실로 100여 년만에 서로 짝을 이루어 신비로운 하모니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어찌 '흔적을 찾아서' 길떠난 필자에게 기쁨과 보람 아니리요. 이처럼 소중한 기록들을 정성스레 갈무리한 아름다운 손길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복 있을찌어다!

'평양숭실대중학교에서는 연전에도 거대한 금전을 연조하야 가지고 대학생 김형재 씨를 제주도에 파송하야 얼마간 전도케 하였고…(평양숭실대학역사자료집IIp.9 대한야소교회보 1911.5.23.)'

'1909년 평양숭실학교 기독학생회로부터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주 선교사업을 크게 확장시킨 김형재 씨는 장로교 초기 전도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1914년부터 24년 간 권서(勸書 Colporteur)로 봉직하면서 수십만 권의 단편 성경을 팔고 전도하였다. 성경전서 311권, 신구약 3223권, 단권 12만4520권, 계 12만8054권.(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공저 대한성서공회사II p.501, p.615)'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A Cabin in the Forest)

"김형재 목사님이 기거하셨던 그 집을 가리켜 우리들은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이라 불렀답니다. 매산등 빽빽한 숲속에 있었거든요. 그 집에선 유성기 소리가 들려왔고, 때로는 피아노, 바이얼린, 트럼펫 등 온 가족이 어울려 연주하는 찬송가 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지기도 했답니다. 미국남장로교 선교본부와 선교사님 집들이 널려있고, 매산학교와 성경학교, 안력산병원이 자리잡고 있던 매산등은 참으로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아, 천국은 저런 곳 아니겠는가?'"

지방신문 기자출신으로 본보 순천지사장을 역임한 김수웅 장로(순천동부교회)의 증언은 가히 환상적이다. 최근 이웃 광양시가 공모한 '우리고장 옛이야기'에 장원으로 당선, 금상 수상과 함께 '향토사학자'로 등극함으로써 그의 증언은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 길 건너 이웃에 살고 계신 김영순 원로권사(순천드림교회, 94세)의 증언이 그를 뒷받침한다.

"그 집을 가리켜 '커피 먹는 집'이라 했습니다. 쓰디 쓴 커피를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웃 사람들이 빈정거리기도 했답니다. 내외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다닌다고 흉도 봤고요. 사모님이 입술을 빨갛게 칠했고요, 노랑 모자도 썼고요, 뾰족구두도 신고 다녔어요. 그게 참 놀랍고도 신기했었구먼요."

일찍이 미국에 유학, 이른바 서양 신식문물을 접했던 김형재 목사 가정을 향한 이웃들의 시선은 부러움과 신기함과 놀라움이었을 것이었다. 그토록 재미있는 옛이야기에 잔뜩 심취했던 필자 일행은 직계손 김준선 교수의 증언에 갑자기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했다.

"해방과 함께 동네 청년들이 일본신사를 허물어 버렸답니다. 그때 조부님께선 순천 사람들이 재수없다고 외면했고 일본 사람들은 신성시했던, 그 신사의 제단석을 가져오셔서 저의 집을 오르내리는 계단에 그 돌들을 깔아놓으셨다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섬기던 신사의 신성한 제단을 장식했던 잘 다듬어진 거룩한 제단석을 더러운 신발로 짓밟고 오르내리겠다는 심산이셨던 겁니다. 저의 집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서른여섯 계단입니다. 36년 일제 압박과 설움을 되새기며 짓밟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콘크리트 포장을 해서 쉽게 오르내릴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조부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오늘도 저희들은 힘을 다해 계단석을 짓밟으며 오르내리곤 한답니다."

'숲속의 작은 오두막집' 서른여섯 돌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천천히 내려오면서 필자는 문득 야곱의 사닥다리를 생각했다. 어렸을 적 마음엔 신기롭기만 했던 야곱의 꿈을 되새겨야 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세기 28:12~14)"

김형재 목사, 그는 그때 서른여섯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야곱의 꿈을 꾸었던 것 아니었을까? 거룩한 성(Holy City)을 짓고 있는 순천(順天)사람들이여, 오늘 그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그 때 그가 꾸었던 그 꿈 이어받아 오늘 그대들도 아름다운 꿈으로 화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여! 나의 조국에 해방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조국에 통일을 주시옵소서. 아멘!

고무송 목사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전 본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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