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과 눈의 교훈(마 6:19~2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3월 11일(금) 07:27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4
산상수훈의 이 문단은 세 소단락으로 짜여 있는데 각기 세 가지의 독립적인 어록이 편집된 결과로 파악된다. 먼저 19~21절은 인간이 가장 중하게 여기는 물질적인 가치로 '보물'을 상정하여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지 그 기준에 대해 가르친다. 이어지는 22~23절은 '몸의 등불'로서 눈의 위상과 역할을 설정하면서 그것이 단지 몸이 움직이는 바깥을 밝히는 시각기능에 머물지 않고 '내면의 빛'을 성찰하는 측면에서 어떤 은유적인 의미를 띠는지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24절은 첫째 소단락이 다루는 '보물' 관련 어록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그 사람들을 지배하는 '맘몬'으로서 어떤 위력을 갖는지 경계하면서 그 재물을 주인 삼든지, 아니면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주인 삼든지 양자택일의 불가피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이 문단의 구조는 유사한 주제를 A와 A의 관계 속에 배치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의 적절한 값어치를 분별하는 눈(안목)이란 주제를 B의 항목으로 삽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째 소단락에서 언급하는 것은 이 땅에 인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집착하기 쉬운 '보물'이라는 주제다. 그것은 인간의 경제활동으로 생겨나는 모든 물질적인 가치의 총화이며, 특히 희소가치가 있어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되 가능한 한 많이 축적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관리하며 그렇게 자신의 사유재산을 증식해나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니 그런 행태를 지양하라고 명한다. 즉, 물질적인 보화는 소유가치와 저장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재화에 대한 전도서의 풍성한 교훈대로 이 세상에서 열심히 모은 그 보물 같은 소유재산은 적절한 쓰임새를 적시에 찾지 못하면 결국 엉뚱한 사람의 차지가 되거나 헛되이 낭비되거나 온갖 불화와 불행의 빌미가 되곤 한다. 예수께서는 이를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그 보물을] 도둑질한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좀과 동록'이 여기 등장하는 것은 당시 금, 은, 동으로 만든 화폐를 땅속에 감추어두면 그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녹이 스는 경험적 이치에 빗댄 것이다. 그 반대로 그 재화를 쌓아두지 않고 올바른 사용가치를 찾아 적절하게 적시에 잘 쓰면 그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유익하다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며, 이를 '땅'에 쌓아두는 것과 대립적인 관계로 설명한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보물을 "너희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재화를 최대한 활수하게 가난한 자의 구제나 선한 공익 사업에 희사함으로써 장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종말론적 보상의 원리를 암시한 것이다.

셋째 소단락의 어록(6:24)은 이 첫째 소단락의 어록과 연계하여 해석하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선한 용도로 쓰지 않고 '땅'에 소유가치로 축적하는 데 국한해버리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처럼 숭배될 위험을 직시한다. 실제로 고대 근동에 재물을 신격화한 개념으로 '맘몬'이라는 신이 존재했는데 예수께서 여기서 언급하는 재물도 바로 이런 어휘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피조된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사용되도록 피조된 물질을 숭배함으로써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한쪽을 택하여 예배할 수 있을 뿐, 그 둘을 모두 주인 삼아 섬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소유욕에 눈이 멀어 물질을 인격체, 심지어 신격체로 받들어 섬기는 오늘날 자본주의 세상의 현실을 감안할 때 간명하면서도 적나라한 비판적 일격을 가하는 어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어록의 중간에 위치한 눈의 어록은 제자들이 분별심을 잃고 오판할 때 몸을 망치고 그 몸으로 살아가는 생명을 해하지 않기 위해 진리의 빛에 터한 내면적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한다. 눈을 '몸의 등불'로 표현한 이 어록은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계에서 발전시켜온 시각발생 이론의 맥락에 연계된 메타포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그 눈이 성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시력이 좋거나 나빠 그 눈이 속한 몸을 잘 인도하거나 그렇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일차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당 희랍어 원어(haplous/poneros)는 자신과 바깥 세계에 대한 내면적 성찰에 있어 성실함이나 사악함을 표상하는 윤리적인 함의로 새길 수도 있다. 특히 미완의 문장으로 제시된 결론구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란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 생명에 내장해둔 '진리의 빛'이 바깥의 태양빛과 만나 시각기능이 발생한다는 전제를 넘어 더 깊은 교훈을 강조한다. 즉, 눈의 시력이 나빠도 온 몸이 어두운데 하물며 내면에 스스로 말씀의 빛으로 간주해온 그 진리가 온통 어둠일 뿐이라면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겠느냐는 전복적인 성찰의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제 깜냥껏 제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성찰하는 삶이지만 그 모든 것에는 나름의 수준이란 게 있다. 보물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고 한 술 더 떠 그것을 신(맘몬)으로 삼아 숭배하는 데 집착하는 삶이 있다. 또 그럭저럭 지식이 있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내면의 실상을 까발려보면 온통 어둠의 혼이 똬리를 틀고 있는 표리부동의 삶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신실한 제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터한 환한 진리의 빛에 비추어 그 속내의 실상을 정직하게 통찰하고 이로써 제자도의 삶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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