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기도의 교훈(마 6:5~8)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2월 23일(수) 13:40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1
경건의 두 번째 항목으로 예수께서는 이 문단에서 구제에 이어 기도의 예를 제시한다. 흔히 기도를 일러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 기도를 바치는 구체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향하여 대화하고 소통하는 또 다른 중요한 경건의 행위이다. 지금은 그 감각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고대인들은 신에게 기도할 때 어떤 자세와 언어로 기도해야 신을 노엽게 하지 않고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어떤 격식을 쫓아 기도할 때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지, 그 제의적 규범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 전제와 행태에서 잘못 드리는 기도는 전혀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경우에 따라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그레코-로마의 종교제의뿐 아니라 히브리 종교와 당시 유대교에서도 매우 준엄하게 다루어진, 따라서 신자로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신앙적 경건의 필수 수칙이었다.

산상수훈의 이 대목에서도 예수께서는 먼저 경건을 내세워 드리는 기도가 실패한 잘못된 사례를 지적한다. 그 실패의 이유는 경건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외식', 즉 위선에 있다. 겉과 속이 다른 분열된 연극배우의 행태로서 이 외식의 문제는 구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도에서도 그 행위를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작위적으로 꾸미고 연출하려는 욕구에서 발원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당시 종교적인 지도층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의 행태에서 자세히 관찰한 바대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 6:5)는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잘못된 것은 기도의 일차적인 초점이 그 대상인 하나님께 맞춰져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맞춰져 그들의 인정과 칭찬을 도출하려는 작위적인 의도를 기도라는 경건의 행위와 섞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경건에 대해 사람들의 인정과 칭송을 이미 받았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선사한 보상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외식'에 머물지 않고 불경하기까지 한 것은 하나님을 개입시켜 연출한 기도의 행위로써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에서 신성모독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교훈은 구제와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의 '은밀함'에 맞춰져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한 경건의 마음을 표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면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그 은밀한 것까지 살피고 아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의 인정 욕구를 최대한 배제한 순수한 경건을 인정해주고 보상까지 해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강조하는 경건과 그 맥락이 공동체적 차원의 집단예배라기보다 '사적인 경건'(private pie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부정적인 기도의 사례로 예수께서 지적한 것은 그럴듯한 말을 많이 늘어놓으면서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행태이다. 여기서 중언부언한다는 동사는 그 본래적 의미에 대해 학자들이 다양하게 추론해왔는데 대체로 이방인들이 종교적 열정을 바쳐 벌이는 이교적 광란의 기도 현장이 전제되어 있다. 특히 의성어 '바,바,바,바 …'라는 별 의미 없는 괴성으로 자기 최면과 자기 흥분의 도가니를 연출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강렬한 감염효과를 유발하려는 시도와 상관된 것이라는 추론이 그 배경으로 설득력 있다. 그것은 수많은 말들을 배설해놓지만 그 풍성한 말의 잔치가 아무런 경건의 효용성도 없고 하나님께도 용납되기 어렵다는 비판이 이 부정적 논평에 담겨 있다. 예수의 비판은 단호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은 말로 기도해야 들어주시는 그런 수준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마 6:7). 오히려 그 반대가 신학적 진실에 가깝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가 무엇을 기도로 구하기도 전에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 그 증거이다(마 6:8).

그렇다면 우리는 신자로서 왜 기도하며 아뢰고 구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그 자녀들이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녀의 위치에서 예를 표하며 여쭙고 칭송하며 예찬하는 일, 하나님의 위치에서 격려하며 강복하고 계시하며 훈계하는 일이 두루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속적인 신실한 관계의 유지와 확립을 위해 기도라는 대화와 소통의 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의 종교집회, 각종 대중예배의 현장에서 기도는 회중을 조종하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작용하거나 교양인의 덕목을 계몽하는 자기 현시적인 장치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반대로 개인적인 기도조차 그 기도의 시간과 열정과 자신의 욕망을 쥐어짜는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겁박하려는 이른바 왜곡된 '강청기도'의 자세로 기도의 신학이 적잖이 오염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본질로서 사적인 경건의 은밀한 실천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확고하게 재발견하게 된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