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사랑의 이유(마 5:43~48)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2월 08일(화) 06:30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9
산상수훈의 이 대목은 마지막 여섯 번째 반제로 예수의 신학과 신앙의 궁극적 지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랑 계명'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온전하신 '하나님 닮기'(imitatio Dei)로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든지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그 삶의 지향을 신적인 온전함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먼저 잘못된 해석을 반박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인용한 레위기 19:18은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서에 여러 번 인용되는 사랑 계명의 구절로 이른바 '성결 법전'(the Holiness Code)의 중심 주제를 이룬다. 여기 인용 방식으로 제시된 '~라고 말해졌다고 너희는 들었다'는 틀은 앞의 선례에 준한 것이다. 그 인용한 구절의 내용에 대해서는 적잖이 학문적 논쟁이 있어왔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 인용된 내용이다. 여기서 앞부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나오지만 그 뒤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은 레위기는 물론 구약성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네 몸[=자신] 같이'라는 비교 준거가 생략되어 인용되는 점이 수상쩍게 여겨져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다양한 추론이 제기되었다.

먼저 후자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산상수훈의 원자료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어 그대로 인용했다는 설명이 가장 간단한 해법이다. 혹자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구로 축약했다고 보기도 한다. 신학적인 맥락에서 조망하면 이 단락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강조하고 있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마저 그 일부로 여겨지는 경우 하나님을 온전함과 거리가 먼 나르시시즘의 틀에 속박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관점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항간의 잘못된 해석적 논평으로 예수께서 추가로 언급하면서 반박하고자 의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각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고 하나님이 거부한 사람을 모두 미워하라'는 쿰란공동체의 이원론적 관점을 그 배경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구약성경과 랍비유대교 문헌 그 어디에도 이런 교훈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곳이 없다. 다만 구약성경으로 소급되는 유대교 전통뿐 아니라 헤시오드와 플라톤으로 소급되는 헬레니즘 전통에서도 공히 누가 진정한 이웃(친구)이며 누가 원수(적)인가, 또 그 이웃과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주제가 매우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질문의 통상적 결론은 동서고금의 인간적 경험을 통해 드러난 바대로 자신에게 친절하게 행하는 이웃(친구)을 가까이 사랑하고 그와 반대로 적대적으로 행하는 원수(적)를 멀리하며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태도가 윤리적으로 온당하며 '정의'의 원리에 걸맞은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원수를 미워하는 게 마땅하다는 통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는 산상수훈의 본문에 드러난 예수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만 그러한 윤리적인 관점이 예수의 경우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는 차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 도드라진 특징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어지는 예수의 가르침은 항간의 통념과 인간적 본능에 반하는 견결한 윤리적 정언명령으로 제시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는 자신을 해코지했거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적이다. 그 해코지는 산상수훈의 제자공동체에 '핍박'의 방식으로 다가오곤 했을 것이다. 그런 자를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은 무엇보다 그 핍박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빌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자녀]"이 되는 보답으로 나타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천국의 '자녀'로 인정받고 수용된다는 것은 산상수훈 특유의 급진적 실천(행함)에 따른 구원론의 진경을 예고한다.

이어지는 5:45하반절~5:47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신학적 윤리적 근거에 해당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닮기'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창조론적 법칙을 먼저 언급한다. 이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적시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이 그 선악 간의 차이나 의와 불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생명체로 편협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도덕 윤리적 기준을 넘어 존중받고 하나님 앞에 잠재적인 구원 백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 한 가지 기준은 세리와 이방인들이 각기 배타적인 울타리를 형성하여 그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그들끼리 동아리 의식을 가지고 유유상종하는 패턴 속에 서로 문안하고 사랑하는 우정의 파당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인이 심각한 죄인으로 경멸하던 세리나 이방인들의 수준에 불과하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산상수훈의 천국 복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5:48은 결론구로 하늘 아버지 되신 온전한 하나님의 그 온전함을 닮으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온전함'(teleios)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존재론적 함의로 새기면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온전함'은 존재론적(ontological) 개념이 아니라 목적론적(teleological) 개념이다. 이는 우리가 정한 목표와 삶의 지향점을 향해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를 따른다는 제자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이 많은 이 시대에 이들의 외형적 공동체로 교회도 많고 교단도 많지만, 그 부류의 사람들이 각기 저만의 울타리에 갇혀서 자기들끼리만 챙기고 사랑하며 돌본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닮기'라는 예수 신앙의 목표에 턱없이 미달된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온갖 배타적인 경계를 넘어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깨우치며 만유 가운데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런 '하나님 닮기'를 열망하는 신학적 상상력이 긴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신학적 상상력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만큼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갈 수 있고 이에 비례하여 우리의 신앙적 윤리도 성숙의 길로 진보해갈 수 있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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