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고 문명개화하여 애국하자"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1월 01일(화) 16:35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6. 안창호 <1>소년 안창호의 꿈

독립협회 평남지회 회원으로 활동할 당시 안창호(가운데)와 동지들. /출처 독립기념관

안창호(安昌鎬)는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 지리적으로는 대동강 하류의 여러 섬 가운데 하나인 도롱섬에서 농사짓는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1878년 11월 9일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열일곱 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양성 전투를 비롯하여 평안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전화(戰禍)가 휩쓸고 지나간 후 사람들의 삶은 처참하였다. 이를 목격한 소년 안창호에게 질문이 생겼다. '어떻게 다른 나라들이 자기 마음대로 이 땅에 군대를 끌고 들어와서 전쟁을 벌이게 되었나.' 그는 자신의 멘토였던 필대은(畢大殷)에게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필대은은 안창호 보다 몇 살 연상이었고 한문에 능통하여 중국어로 된 서적을 통해 나라 바깥 사정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예수교인이었고 평양 시내에서 서양 약방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흐름을 남들보다 많이 알았을 것이다.

안창호는 필대은과의 토론에서 하나의 결론을 얻게 되었다. '다른 나라가 우리 강토에 제멋대로 들어와서 전쟁을 벌이고 설치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어서 그런 까닭이다.' 힘이 있어야 나라의 독립과 주권이 수호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힘은 '덕(德)을 지니고 지(智)를 겸비하고 애국심 있는 나라의 백성이 많을수록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소년 안창호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에 와서 거리를 배회하던 중, 선교사 밀러(F. S. Miller, 閔老雅)가 어눌한 우리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이다~!"

이 소리에 이끌려 밀러 선교사가 운영하는 예수교학당(경신학당의 전신)에서 수학하였다. 안창호는 예수교학당에서 성경을 비롯한 산수·철학·음악·지리·성경과 교리문답 등 근대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윽고 송순명(宋淳明)이라는 사람의 설득으로 장로교인이 되었다. 송순명은 예수교학당의 전신인 구세학당(救世學堂)의 첫 학생이었고 이후에 새문안교회 조사가 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예수교는 서양문명의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을 상징하는 종교였다. 당시 상황을 김구 선생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중략)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백범일지, 185쪽) 안창호가 예수교학당을 통해서 서양학문을 배우고 이어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를 뒷받침 하듯 그즈음의 '독립신문'에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사설이 심심찮게 실렸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문명개화한 나라는 모두 기독교를 믿는 나라인데, 이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문명개화하는 데에 긴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독립신문, 1897.1.26.)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으나, 예수교와 같이 참으로 선량하고,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타인의 곤궁함을 살피는 종교는 이 세계에서 달리 없다. 어떤 종교가 천하만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금전을 보내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타국인을 가르치고 치료하고 돌보겠는가~!"(독립신문, 1898.8.20.)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문명개화에 나서는 길이다. 문명개화를 통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우리의 주권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소년 안창호가 앞으로 살아낼 삶의 첫 단추는 근대학문을 배우고 예수를 믿는 일로 시작되었다.

이치만 교수/장신대·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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