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없는 자주 독립국가' 신념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8년 11월 20일(화) 10:19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4. 조만식 <2>해방 후 조만식이 꿈 꾼 나라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온 조만식은 숭실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 사진제공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만식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조만식은 오래 동안 평양을 거점으로 반일민족운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거주하는 가장 분명한 민족지도자였다.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이 조만식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을 내세워서 만든 정권이다.

그러면 원래 조만식이 꿈꿨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해방 후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토의 분단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표로 만들어진 3·8선이 한반도를 둘로 나누는 국토의 분단선으로 변형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조만식은 이것을 걱정하였다. 소련군이 조선에 진주해서 각 도에 인민위원회를 만든 다음에 이북 5도 인민위원회라는 북한 단독정부를 세운다고 했을 때 조만식은 이것이 분단의 시초라는 것을 알았다.

소련군은 조만식에게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것을 거절하였다. 이같은 조만식의 생각은 조선민주당의 창당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의 목적을 '통일된 중앙정부의 신속한 출현'을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당시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것이었다.

조만식은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꿈꿨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을 향하여 조만식은 "당신들은 해방군이요, 점령군이요"라고 질문했다. 조만식은 처음에는 김일성을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고 그와 협력을 했지만 신의주 사건 때에 김일성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분개했다. 신의주사건에서 보여준 김일성의 친소태도는 조만식이 김일성과 결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만식은 국제사회가 이미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조선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소련은 이 카이로 선언을 받아들였다. 조만식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주장은 바로 이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주독립에 대한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조만식은 민주주의자였다. 원래 조만식은 건전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전통적인 봉건계급도 아니고, 공산주의적인 '인민'도 아니라 건전한 도덕과 책임을 갖춘 근대 중산층 시민이다. 조만식은 평양의 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자수성가한 사람들로서 기독교신앙을 갖고 사회의 도덕적 책임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 점이 해방이후 미국과 소련의 차이점이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만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에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들을 제외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표현의 자유문제 때문에 미소공의회는 결렬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요즈음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남북의 정치지도자들, 경제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이 만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나라를 꿈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조만식이 꿈 꾼 나라, 그런 나라가 북한 땅에서 세워질 수는 없을까?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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