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의 요람, 부산진일신여학교
[ 선교여성과교회 ]
작성 : 2024년 04월 11일(목) 03:30 가+가-
경남지역 여전도회 6

삼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출감한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부산진일신여학교가 근대역사 가운데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삼일운동에서의 역할 때문이다. 즉 부산지역 삼일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부산진일신여학교다.

부산은 삼일운동을 전후해 일본과 상해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출입하던 곳이었던 까닭에 독립운동의 동향에 민감한 곳이었다. 하지만 부산진일신여학교가 삼일운동을 주도하기 전까지는 계획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

삼일운동이 발발한 직후, '독립선언서'가 부산과 마산에 배송되었고, 서울의 학생대표가 부산을 방문해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참여를 독려한다. 3월 7일에도 연희전문학교 학생이 내려와 동래 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에게 다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3월 11~13일 사이에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독립선언서'가 전달되거나, 만세운동 참여에 대한 권유는 없었으나, 4학년 학생 김응수가 전단을 주워 기숙사 주경애 선생에게 전달했다. 민족독립의지가 강했던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 그리고 고등과 학생 11명(김응수, 송명진, 김순이, 김난출, 박정수, 김반수, 심의순, 김봉애, 김복선, 김신복, 이명시)이 전날 밤새워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11일 오후 9시경에 좌천동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한다.

많은 시민들이 호응했으나, 학생들과 교사들은 일경에 체포되었고, 구타와 고문 등의 고초를 겪는다. 결국 교사들은 1년 6개월을 그리고 학생들은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교사들과 학생들의 체포와 수감은 부산지역 삼일만세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삼일운동의 요람이 된 이유는, 모든 학교 구성원의 민족의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 교사들, 학생들 모두 한마음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일제가 남긴 다음의 기록은 이들의 협력과 노력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i>"부산진 소재 야소경영 일진(신)여학교 선인여교사 임말이 외 생도 1명을 취조한 바 동교 교장인 캐나다인 여선교사 데이비스 및 조선인 여교사 주경애가 주가 되어 교원 일동에 대하여 '각 지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고 협의하고 이를 생도에게 전하여 3월 10일 동교 고등과 생도 11명이 기숙사에서 구한국기 50개를 제작 이를 동교 기숙사 감독 멘지스에게 주었다고 하여 동인을 취조한 바 깃대 31본을 생도에게 제공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가택수색 결과 기숙사 쪽에 있는 미곡 속에서 구한국기를 발견하고 또 기를 제작하는 데 쓰는 붓 등 여러 가지를 발견하여 압수했다."</i>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선교사, 교사, 학생들은 일제의 횡포에 결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독립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들의 만세시위는 당시 학생신분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졸업생 김반수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남아있다.

<i>"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로 가지고 나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부르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답니다. 그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지 하는 일념 때문에 일본경찰에게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항의를 했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정말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대견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i>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독립만세시위는 이후 일제강점기하 부산지역 여성운동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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