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부산진일신여학교와 근대여성교육
[ 선교여성과교회 ]
작성 : 2024년 04월 04일(목) 13:49 가+가-
경남지역 여전도회 5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설립은 호주 여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이다. 현재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인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校舍)에서 부산지역 최초의 근대여성교육이 본격화되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b># 고아들의 어머니 벨 멘지스</b>

벨 멘지스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의 어머니였고, 버림받은 소녀들의 어머니였다. 존 브라운은 "열 명의 형제자매 중에 첫째로 자란 벨 멘지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되는 법을 익혔다. 어른이 되어 그는 많은 고아를 길러 내었고, 부산에 도착하는 새로운 미혼 선교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었다"라고 멘지스의 모성애를 표현한다.

벨 멘지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멘지스는 '선한 힘을 발휘하는 능력'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능력'을 가진 여선교사들과 부산의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한 선교사였다.

멘지스는 버림받은 소녀들을 돌보기 위해 1892년 미우라고아원(Myoora Institute)를 설립한다.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인해 멘지스는 고아소녀들의 어머니로 사랑받았으며, 이 소녀들 중 많은 수가 지역 교회와 학교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미우라고아원은 1895년 10월 15일 현재 부산광역시 좌천동 단칸 초가집에서 3년 과정의 소 학교 교육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한강 이남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2003년 5월 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한강 이남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다. 둘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최초의 항일만세 운동이 시작된 삼일운동의 요람이다. 그리고 셋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2010년 2월 9일 이곳에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이 설치되었다.

<b># 근대여성교육의 산실 부산진일신여학교</b>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요람이다.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초기 호주선교사 중에는 미혼여성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접촉이 쉽고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교육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었다. 초기에는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운영했지만, 후에는 근대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정식교육기관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들 호주선교사들이 여성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먼저 교육되어야 하고, 이러한 여성교육은 가정과 사회에서 미래의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교육이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남성중심의 교육이었던 반면에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인 동시에 소외계층 특히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뿐만 아니라, 한강 이남 최초의 근대여성 교육기관이었다. 교육의 내용은 단지 기독교교육을 넘어 인문사회 및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성경뿐만 아니라, 당시의 소학교령에 의한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재봉, 영어 등을 교육했으며, 고등과에서는 서울의 이화학당처럼 성경, 한문, 대수, 기하, 삼각, 천문학, 지문학, 심리학, 교육학, 물리, 화학, 영문학, 만국지지, 고등생리, 경제, 역사 등의 교육이 진행되었다. 물론 학생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민족교육을 받았다.

이는 삼일운동에서 보여준 학생들의 역사의식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편 호주의 여선교사들은 근대여성교육과 함께, 생활환경 개선과 의식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여성들도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 신생활 운동이라고 하여 옷차림으로부터 위생적 생활, 물색 옷을 장려하는 일, 금주금연 운동,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은 처음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여성들의 자발적인 역사참여였다고 본다.

이러한 근대여성교육에 있어 장로교 여선교사들과 여성들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1898년 축첩반대 운동을 효시로 하여 기독교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때 일찍 개화된 사람은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이었고 절대다수가 장로교였던 점을 비추어 장로교 여성 활동을 일반기독교 여성 활동과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다.

특히 전국연합회 회장이었던 김마리아 선생, 한영신 선생, 신의경 선생 등은 모두가 장로교 여전도회 지도자였으며, 동시에 민족역사 속에 뚜렷이 남는 애국운동가로서 이 사실 속에서 여전도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했던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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