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여성을 위한 호주 여성들의 선교 활동
[ 선교여성과교회 ]
작성 : 2024년 03월 28일(목) 14:17 가+가-
경남지역 여전도회 4
조선사회의 기틀을 이룬 유교 오륜의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 등의 인간관계에는 여성이 들어있지 않다. 부녀, 모녀, 자매, 남매 관계는 없다. 부부 관계가 있기는 하나 '아내라고 하는 정체, 곧 남편과의 관계에서만 내용이 채워지는, 말하자면 타자화 된 여성'이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이러한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한 삼종지도, 즉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르도록 여성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유교사회에서 유교적인 여성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혁명적인 기독교를 만난 것이다.

선교 초기의 정책에 있어서 여성들에 대한 선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93년 1월 재한 장로교선교부공의회에서 채택한 선교정책 중 두 번째는 '모성(母生)은 후대(後代)의 양육(養育)에 중요한 영향력을 주는 관계상 부녀자(婦女子)의 지도(歸道)와 청소년(靑少年)의 교육(敎育)을 특수목적(特殊目的)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 남성선교사들이 여성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남자 선교사들이 '사랑방'을 통해 남자들에게 가까이 가는가 하면, 여자 선교사들은 '안방'으로 찾아들었다. 이리하여 공개전도(公開傳道)가 금지되었을 시기에도 전도사업은 개인 접촉과 가정 방문으로 진행되었다.'

호주교회 여선교사들은 가장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들을 위한 선교를 진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벨 멘지스는 조선 여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한편,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와 소망의 복음을 선포하고, 부산 여성의 생활과 의식의 변화를 위한 교육선교에 헌신한다.

이사벨라 비숍은 부산에서 선교사역 중인 3명의 '호주 아가씨들'(매리 퍼셋, 진 페리, 벨 멘지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비숍은 그의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제1장 조선의 첫인상'에서 조선의 관문 부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여선교사들의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비숍은 다음과 같이 여선교사들의 생활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방이 너무 낮아서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은 일어설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 까지 계속적인 조선 부인과 아이들의 침입으로 개인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으며 옷 입는 것조차도 커다란 구경거리가 되었다."

특히 비숍은 이들 여선교사들을 두 차례 방문해 아래와 같이 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부산 여성들의 형편과 여선교사들의 사역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처음 여선교사들을 만난 후 기록한 아래의 내용은, 여선교사들이 조선 사람들 가운데서, 조선인들과 함께 살면서, 조선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아이들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꽤 많은 부인들이 옷을 청결하게 입도록 지도받고 있었다. 모든 이웃들은 우호적이었으며, 거리에서 무례한 말을 하는 것도 사라졌다. 부인들의 대다수는 의료적인 도움을 호소하였으며 조금만 도와줘도 그들에게는 많은 기쁨을 안겨 주었다. 매우 혐오스러운 환경 아래 1년을 함께 생활한 결과로 이 정도의 우호적이고 개화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2.5마일 떨어진 언덕 위의 거대한 저택에 살았다면 아무런 결실도 없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또한 1년이 지난 후 두 번째 방문에서는, 여선교사들의 '변함없이 현신적인 선교사역과 변화된 선교열때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학란과 청일전쟁으로 인한 소용돌이도 그들의 선교를 방해할 수는 없있다. 2년 동안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용과 호의를 얻은 그들은 넣은 한옥 자리에 작은 방갈로를 세웠는데 이것은 매우 원시적인 고아원으로 발전했다. 주민들은 처음부터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그들은 격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씨들을 보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가구를 보거나 오르간을 듣기 위해, 그리고 일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묻기 위해 그들을 찾아갔다."

'호주 아가씨들'의 선교 방법에 비숍은 자신의 이론과 일치한다고 언급할 정도로 적극적인 공감을 표시한다. 호주 여선교사들의 선교사역이 한두 해 만에 성공적인 결실을 맺은 것을 비숍의 기록한 다음의 사역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선교 사업'은 이제 매일의 예배를 위한 모임, 세례지원자 반, 낮에 참석하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한 야간반, 80명이 참석하는 일요학교로 구성되었으며, 사람들을 방문하여 시골과 마을 주변에서 교리 공부를 시키고 있다. 약 40명의 성인은 신앙을 고백하고 규칙적으로 기독교 의식에 참석한다."

부산의 여성들을 위한 생활개선, 의료지원, 그리고 복음전도뿐만 아니라, 여선교사들은 여성교육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부산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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