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의 의식과 평일의 의식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2년 08월 10일(수) 10:54 가+가-
67

루터의 '노예의지론' 초판(1525)

자아의식은 삶의 기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아의식 없는 순간은 없다. 자아의식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거창한 명제를 떠올리지 않아도 누구나 생각하며 산다. 생각과 행동의 토대에 자아의식이 놓여있다. 매일 전해지는 뉴스에 놀라며 분노할 때도 있지만 이를 환호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분노와 환호의 차이는 뉴스를 판단하는 자아의식에서 나온다. 사회정치적 사건에 대한 민감성은 깨어있는 자아의식 덕분이다.

일상의 생각과 행동을 동반하는 것이 자아의식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동반하는 것도 같은 자아의식일까? 일하고 놀이할 때의 의식과 기도하고 말씀 읽을 때의 의식이 같다고 할 수 없다면, 일상적 의식과 신앙적 의식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사고능력과 행위능력을 길러야 하듯이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 신앙적 의식을 갈고 다듬어야 한다.

자아의식에의 본격적인 탐구는 근대철학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출발은 마르틴 루터(1483~1546)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사에서는 서양의 근대성이 종교개혁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종교개혁이 근대적 자아를 일깨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제일 정신은 신앙적 확신과 이로부터 나오는 자유에 있다. 프로테스탄트적 확신은 사제의 매개 없이 신앙인이 직접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 나온다. 여기서는 어떤 성직의 권위도 교리도 교회의 제도도 이 확신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러한 확신의 주체가 바로 신앙적 자아이며 신앙적 주관성이다.

신앙적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와 뗄 수 없다. 생각하는 자아는 자아가 자아 자신을 생각한다면 신앙적 자아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아의 토대에서 자아를 생각한다. 둘 다 자기관계(self-relation)이다. 생각하는 자아는 <자아(I)-자아(me)-관계>로, 신앙적 자아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아-자아-관계>로 표시될 수 있다. 이 두 관계의 공통된 특징은 확실성에 있다. 그것은 자아의 확실성이며, 자아 속에서 자아보다 먼저 확인되는 하나님의 확실성이다. 자아-확실성이 생각과 행동의 출발점이라면 자아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님-확실성은 믿음으로 나타난다.

신앙적 자아의 확실성은 생각하는 자아의 확실성을 앞선다. 여기서 앞선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앞서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적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 및 행동하는 자아의 전제이다. 자아의 생각과 행동은 신앙적 자아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아의 활동은 자연스레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욕심을 넘어서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부분보다 전체를 염려하는 행동은 신앙적 자아의 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생각과 행동은 능동적이지만 믿음은 수동적이다. 루터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한다. 신앙인은 믿음을 통해 자유를 얻으나 이 자유는 은총의 자유이므로 그 자체가 수용적이고 수동적이다. ‘오직 믿음(sola fide)’의 구호는 내면의 확실성에 대한 요구이다. 이것은 자아가 능동적으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 자아에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루터가 『노예의지론』 (De Servo Arbitrio)에서 말하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은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은혜의 하나님이다. 계시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앞서 주어진 것이며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인간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반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율법준수와 같은 애씀에도 불구하고 ‘숨어있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믿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극명한 대립이다.

자아의 구조가 이렇게 밝혀졌으므로 남는 것은 자아의 능력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신앙인은 천상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산다. 신앙인에게 주일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일의 삶도 있다. 평일에는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살고 주일에는 수동적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평일에도 생각의 능동성과 믿음의 수동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일과 평일의 조화가 간단하지 않다고 토로한다. 가장 바람직한 건 평일을 주일처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난제 중의 난제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주일을 중시한다면서 평일의 기준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능동적 생각과 행동을 무시하고 심지어 죄악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일의 삶에도 평일의 삶이 필요하다. 상식에 어긋나고 평일의 기준도 충족하지 못하면서 믿음만 앞세우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21세기의 현대인은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적 기준을 지키지 않는 공동체를 당연히 외면한다.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의 조화는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할 바로미터다.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