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의무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2년 06월 15일(수) 11:30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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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엠마누엘 레비나스 광장'(좌)과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우).

의무의 원칙을 강조하였던 칸트의 유명한 슬로건은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건 다른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건 인간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갓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 하라"이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도덕적 요구 때문이라고 보았다. '양심'이나 '의무'가 그것이다. 칸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외에도 '타인에 대한 의무'를 중시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상호 배려'의 마음은 의무와 도덕적 실천에 수반되는 기본적 태도이다. 이 세 요소들은 서로 분리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존립하기도 한다. 첫째,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이다. 우리는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할까? 이웃사랑이란 실천적 삶의 문제이다. 누군가에 대해 호감을 갖는 문제를 넘어선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하는 명제는 이성의 실천적 능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지키는 도덕적 법칙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내가 다른 모든 사람의 사랑을 원하듯이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둘째,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가 있다. 인간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갖으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또는 타인이나 자신에 의해서도 한낱 수단이 아니라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세계 내 존재자 위에 군림할 수 있다. 그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의 의무에 따라 자신을 어떤 가격에도 내다 팔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기 존중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저해하는 행태를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즉, 인간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의 존엄함을 실천적으로 인정하도록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 반드시 존경을 보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배려'와 같이 인간 상호간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 두 사람 이상의 타인 간에 진정한 의미의 교제가 가능한 경우는 아마도 서로 배려심이 있을 때 일 것이다. 배려심이야말로 도덕적 선의지에 의해 발동하여, 사람들이 화합하여 상호복리를 증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 현상이다. 배려의 공동체는 상호 관심과 존중이 결합된 연합체이다. 그리고 이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호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칸트는 인간이 도덕적 완전성을 갖고 사람들과 교류해야 하며, 이를 위해 진정성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 개인의 책무임을 강조하였다. 다만 우리의 일상에서 도덕적 완전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심지어 타자에 대한 의무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배려심 조차 고갈된 인생과 종종 맞서게 된다는 점이다. 동시에 무책임하고 이해 불가한 타자와 대면해야만 하는 당혹스런 현실에 놓이기도 한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성장한 유대계 철학자였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는 제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서구의 합리성과 주관중심 문화에서 잉태한 전체성과 폭력적 현실을 몸소 체험한 사상가였다. 그는 유럽인이었지만 유럽인이 아니었으며, 지식인일 수도, 한 평범한 인간으로 존립하는 것 조차 거절당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다.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이런 알리바이 속에서 형이상학은 생겨나고 유지된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표기된 문장이다. 전통적인 존재론에 내재해 있는 주관주의적 세계관은 엄연히 존재하는 타자를 익명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모든 가치판단의 중심에 오로지 이상적인 도덕적 자아만이 위치한다. 레비나스는 실재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보편적 대상으로 간주되는 자아 만을 인정하는 시선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발견한다.

칸트가 인간 자신에 대한 각성과 반성능력을 중시했던 부분을 넘어 레비나스는 인간됨의 가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며, 헌신하고 희생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간다고 보았다. 이기적 자아가 윤리적 자아로 전환될 때 자기의 사적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책임을 감수하려는 태도가 된다. '타자'는 사회적으로 낮고 천한 자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극히 높은 자의 모습이 투영돼 활동한다. "영광스런 비천함,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타자의 얼굴 그 자체가 계시가 되며, 단순한 화두가 아닌 명령의 형식으로 각자의 양심에 요구하는 창이 된다.

임채광 교수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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