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에 대하여(마 6:25~3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3월 22일(화) 14:27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5
산상수훈의 이 단락은 고래로 수많은 논쟁과 토론을 야기한 매력적인 주제로 특히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많은 철학자, 문인들이 다룬 주제이며, 종교 쪽에서도 이와 관련한 여러 처방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곧 '염려'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는데 산상수훈은 이 염려를 극복하는 신학적 대안으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인간이 염려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불안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왜 염려하는지조차 모르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에 염려를 키우는 경향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탄생하면서 노출되는 인간의 연약한 삶의 조건이 수많은 불리한 환경과 대적들에 둘러싸이면서 또 염려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당시 로마제국기는 정치적 갈등과 사회경제적 불안으로 '염려의 시대'로 불릴 만큼 그 동시대인을 둘러싼 객관적인 삶의 환경이 염려로 충만한 시대였다. 뿐 아니라 실존적 맥락에서 인간의 불안과 염려를 다룬 수많은 문학적 철학적 종교적 담론들이 양산됨에 따라 염려는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토론되는 대중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특히 행복을 논할 때마다 그 선결조건이 염려로부터의 자유로 꼽힌 것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염려를 벗어나기 위해 고투했는지 잘 보여준다.

산상수훈의 상기 문단은 인간의 염려가 생존의 위기상황과 결부되어 있음을 명시한다. 그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질문에 잘 나타난 대로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결핍에 대한 염려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수사학적 질문이 세 일정한 변용과 함께 세 차례 반복되는 것(6:25, 31, 34)은 당시 사회가 식량 수급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이에 따라 특히 서민대중이 '일용할 양식'의 중단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불안한 현실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인간의 염려는 동시에 아무리 그러한 객관적인 조건이 충족되어도 "믿음이 작은 자들"로서 불안과 염려가 끊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실존적인 결핍과도 무관치 않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 충족되면 내일의 양식을 위해 염려하는 것이 인간의 생래적인 버릇이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예수께서 제시하는 처방은 일단은 현실적인 자가진단이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라는 수사학적 의문문은 수단이 목적을 훼손하면서 쓸데없는 염려, 불필요한 염려를 부추기면서 그 염려에 사로잡혀 생명을 상하게 할 가능성을 연상시켜준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최우선 가치는 우리의 생명, 목숨 자체이다. 그 최고의 가치는 다양한 부대가치를 유발하면서 우리에게 공적인 사명, 숭고한 존재 목표가 있음을 일깨워주는데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6:33)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먹고사는 동물적 욕구에 저당 잡히면 그 이상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당신의 형상으로 생명을 지어내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은 그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참여하면서 구원을 위한 신적인 공의에 가담하며 제몫을 하도록 공생애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 우선적 관심사에 집중할 때 먹고사는 일과 관련된 모든 필요 또한 응당 충족되리라는 믿음이 여기서 요청된다(6:33).

이와 관련된 또 한 가지 긴요한 처방은 신적인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서 '섭리'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26~27, 30절의 예증에 비추어 보면 창조주의 섭리와 이에 대한 신뢰가 염려를 극복하는 중요한 신앙적 밑절미가 됨을 알 수 있다. 그 맥락에서 섭리라는 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백합화 같은 동식물까지도 하나님의 피조생명으로서 먹고 생육하며 제 몫의 생명 가치를 극대화하며 맘껏 제 존재 의미를 발휘하도록 창조주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돌보는 신적인 선한 의지다. 그런데 하물며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 더구나 하나님의 언약 대상으로 선택해주시며 그 구원사에 파트너로 불러주신 그 백성들을 넉넉히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면서 필요한 제반 물질적인 조건과 환경을 당연히 제공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염려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섭리와 은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염려의 방어기제로 예수께서 제시한 것은 그 저변의 철저한 현실론적 인식이다. 이를테면 염려한다고 해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없는(6:27) 자연법의 이치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항간에 떠도는 '염려한다고 염려가 없어진다면 염려가 없겠네'라는 말은 티벳의 속담인데 이 메시지의 요체에 적중한다. 그러나 예수는 정작 이러한 염려가 하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제공하는 풍성한 선물에 대한 섭리적 인식을 결여한 이방인들이 구하면서 생기는 증상이라고 일갈한다(6:32). 그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구하거나 염려하기 이전에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알고 계시므로 그런 섭리론적 믿음에 의지한다면 그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방과 대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연약하여 염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무기력한 곤경에 종종 빠진다. 이를 직시했음인지 이 문단의 마지막 결론구에서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을 그날로 족하니라"(6:34)고 말씀하신다. 다가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부추기는 염려의 심리적 속성을 간파한 말씀이다. 동시에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은 그러한 미래의 불안을 극복한다 할지라도 부지불식간에 다가오는 예측불허의 생의 곤경이 현존함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은 그러한 인간의 제약 조건을 감내하면서 하루의 일상을 자족하며 살아야 하고, 그 너머의 지평에서 신적인 섭리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집중할 시간과 정신의 몫을 늘려가야 할 것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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