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에 대하여(마 6:16~18)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3월 10일(목) 14:27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3
구제와 기도와 마찬가지로 금식도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경건에 필수적인 요소로 꼽혔다. 개인이 고통 중에 신음하거나 민족이나 국가 공동체 전체가 역사적 위기에 봉착할 때 그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먹는 것을 중지한 채 하나님께 매달리며 도움을 간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강청하면서 절박하게 호소하는 기도와 간구의 방식이었지만 단지 일방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진정한 의미의 금식은 하나님의 공의와 법도를 구현하면서 공동체의 안위를 세우는 윤리적인 지향과 결부된 경건의 실천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가 일찍이 간파한 금식의 핵심적 의미는 새겨둘 만한 신학적 지침이 된다. 이사야 당시 유다 백성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 58:3)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들은 자신의 금식으로 하나님께서 알아주길 바라는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이 별 효험을 보지 못하자 다른 한편으로는 금식하는 날에도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사 58:3) 이중 플레이를 자행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회개의 징표이기도 한 금식을 하면서도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한 채 서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사 58:4) 쟁투가 이어졌다고 이사야는 질타한다. 요컨대 그들의 금식 목표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 목소리를 하나님께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경건의 허울에 사로잡혀 그저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 등으로 위선적인 행태를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사야가 제시한 진정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의 요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령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 나아가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7) 등으로 예시된다. 이를테면 금식의 본령은 그 외형적 경건의 드러냄이 아니라 그 경건이 지향하는 가치, 곧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실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어록을 살펴보면 금식에 대한 교훈은 형식적 겉치레로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경건의 허울과 그 위선적 성격으로 오히려 금식의 본질을 훼손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이사야가 말한 '마음을 괴롭게 하는 행위'로서의 금식이 예수의 관찰에 따르면 "슬픈 기색을 보이"면서 "얼굴을 흉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는 위선으로 표현된 것이다(마 6:16). 그러나 이는 남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와 구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금식이 아니라 자신의 인정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가식적인 모습, 즉 경건에 반하는 모순된 행동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이는 아예 경건도 아니거니와 진정한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내면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태도에 있어 전혀 경건하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금식은 아무리 많이, 오래 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경건한 금식의 태도는 오히려 역발상으로 하나님의 은밀함 가운데 자신의 금식이 은밀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하고 사람들에게는 숨기는 것이다. 그 바람직한 예시로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고 간단하게 명령한다. 금식하면서 호리라도 외형적인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딴에는 이러한 행동도 연출된 것이니만큼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감추는 가식적인 태도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다. 실제로 먹지 않으면 괴로운 건 사실인데 굳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면서 연기하듯 금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극단적인 비유로 경건의 은밀함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금식으로 마음이 괴롭다고 우리의 경건한 자세가 흐트러지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단정하게 태도를 갖춰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마 6:18)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식은 기도의 행위와 결합하여 개인적인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종종 선용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금식한다는 분도 보긴 했다. 문제는 금식하는 신자 앞에 가로놓인 절박한 상황과 그 해법으로서의 금식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 금식이 지향하는 신학적 목표를 놓치기 일쑤이고, 그렇다 보니 그 태도 역시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식은 한 개체 생명을 옭아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해방의 목표를 지향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온전히 구현되는 화해와 일치의 대동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울러, 신앙적 경건의 방식으로서 금식이 그 순수한 열망과 견결한 태도를 상실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경건의 모습과 전혀 무관하고 심지어 그 반대의 역효과가 우려된다. 이러한 궁극적인 지향점을 외면하면 그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한 '외식하는 자'의 반경건, 불경건으로 드러나기 쉽다. 우리는 이 불쾌한 역설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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