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신학(마 6:9~15)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3월 03일(목) 10:34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2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