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은 비전이 아니다
[ 주간논단 ]
작성 : 2019년 12월 03일(화) 05:00 가+가-
50대에 접어든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천사가 나타나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아름다우니,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먼저 아내는 "남편과 세계 일주를 해 달라"고 했고, 천사는 비행기 표 두 장을 쥐어주었다. 남편에게 물으니, 남편은 머뭇머뭇하더니 천사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귀에 대고 "30살 연하의 마누라와 함께 살고 싶다"고 조용해 말했다. 천사가 빙긋이 웃으며 염려 말라면서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 사람은 30세 더 먹은 80대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욕심은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마귀는 틈을 비집고 욕심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자신으로만 가득 채워지게 된다. 이 욕심은 죄를 잉태하게 되고, 죄가 자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약 1:15)

주변을 돌아보면 교회를 크게 짓다가 부도가 나서 이단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일찍이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준비된 것도 없으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시작하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창조는 이미 끝났다. 지금은 섭리의 시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지팡이를 만들어 주시지 않고, 그가 갖고 있는 지팡이를 이용하셨다.

욕심인지, 믿음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욕심'을 '믿음'으로 더 나아가 '비전'으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단골손님이 요셉이다. 요셉은 꿈과 많은 관련이 있다.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고 후에는 관원장의 꿈,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무모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의 꿈은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대답했다.(창 39:6b) 감옥에서 두 관원장이 꿈을 꾼 후에 두려워할 때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했고, 바로의 꿈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대답했다. 욕심이 아닌 믿음만 있을 뿐이다. 우리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게 된다'고 했다.(마 12:33) 욕심인지 믿음인지 처음에는 구별이 안 될 때가 많다. 마치 가라지와 알곡이 자랄 때는 구별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정체가 드러난다. 욕심의 결과는 불법과 불의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고, 세습 등의 방법으로 욕심을 지속하려는 것을 본다. 거의 비전을 말했던 사람들의 결과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이태리 사람은 옷을 입다 죽고, 프랑스 사람은 먹다가 죽고, 독일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다 죽고, 영국 사람들은 집을 고치다 죽는데 한국 사람은 집 늘리다 죽는다"고 말한다. 모두 욕심의 다른 형태를 말한다. 성경은 욕심에 대한 경고를 수없이 많이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욕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욕심을 다스려야만 한다. 사단이 교회를 타락시키는 효과적인 무기 중의 하나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자기만족을 신앙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것이다. 세상의 방법만으로는 성공하고 성취하기에 부족하니 기도와 하나님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세속화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기도가 내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욕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불편해 하심에 틀림없다.(약 4:3)

미국 서해안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할 때, 해변에 가까웠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런데 수영을 잘하는 선원 한 사람의 시신이 떠오르지도 않은 채 바닷 속에서 빠져 죽은 것이다. 건져보니 주머니마다 무거운 보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혹시 이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란다.



장경덕 목사/가나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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