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동이 나의 유서이다"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4월 09일(화) 09:51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0. 김약연 <2>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개교 이래 17년 동안 1,000여 명의 애국청년들을 배출한 명동학교는 1925년 일제의 탄압과 학교 내부의 어려움으로 폐교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암 김약연의 삶은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그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였다. 그러나 그는 책만 읽고 행동을 하지 않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그는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근대교육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또한 그는 서당과 학교 밖 세계를 모르는 샌님은 아니었다. 그는 함께 북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거주지 명동촌을 이상적 공동체로 만들고자 애쓴 사회운동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을에만 관심을 갖고 조국의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업에는 무관심한 지역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명동학교의 교육을 위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학교와 마을의 발전을 위한 명분으로 그저 형식화된 겉치레가 아니었다. 여기서는 지난 호에 기술한 명동학교 관련 내용을 제외하고 그의 열정적인 삶의 궤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규암은 유학을 공부한 선비로서 명동촌에 정착하여 바로 규암재라는 서당을 설립하여 한문과 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이 끝나면 다른 농부들처럼 논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땔나무를 벌채하여 직접 등짐으로 운반하였고 외양간에 소똥을 치우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지식을 그의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함께 이주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명동촌을 개간하여 살기 좋은 마을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명동촌은 규암의 꿈과 사상이 반영된 마을공동체가 되어갔다.

명동촌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이주 초기부터 학교를 세웠고, 학교운영을 위해 마을공동재산인 학전을 마련했다. 규암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명동촌에 정착하면서 광활한 토지를 구매하였는데 그중 전체토지의 1할에 해당하는 땅을 학전(學田)으로 구별하여 교육을 위해 사용하였다.

또한 명동촌은 남녀평등을 실천한 근대적인 마을이었다. 당시에는 남녀차별사상이 팽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규암은 남녀평등을 강조하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1911년 명동학교 내에 북간도 최초로 여학교가 병설로 만들어졌다. 명동학교에 여학생 수는 점차 증가하였다. 명동학교에는 여학생 뿐 아니라 여교사도 재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성경, 음악, 재봉 등을 가르쳤다.

규암의 관심은 명동촌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았다. 간도 지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우리 민족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자치권을 갖도록 노력하였다. 그래서 1909년에는 간민교육회란 조직을 만들어 간도지역 이주민들에게 근대교육을 통해 근대적 의식을 함양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민족교육을 통해 항일구국 정신을 고양하고자 하였다.

1913년에는 간도지역 최초의 한인자치기구인 간민회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간민회의 회장이 되었다. 규암은 이러한 조직들을 통해 모범적인 농촌사회를 만들고자 생산조합, 판매조합, 소비조합 등을 결성하도록 독려하였다. 간민회는 비록 짧게 존속하였지만 간도지역 이주민들의 자치권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주민들과 중국관청 사이의 교섭을 중재하거나 주민들의 어려운 문제를 처리해주면서 중국의 협력을 얻어 항일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규암은 1919년 용정 3.13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만세운동이 무장운동으로 확대되자 무장시위결사대 군자금을 모금하다 1920년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5년 일제의 탄압과 학교내부의 어려움으로 애지중지 키워왔던 명동학교를 폐교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많은 번민 속에 규암은 목사가 되고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뒤 1930년 62세의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바로 그해에 명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와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용정의 기독교학교인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하다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보살폈다. 규암은 1942년 10월 29일 "나의 행동이 나의 유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규암은 선비로, 교육자로, 사회운동가로, 신앙인으로, 간도의 지도자로 살았지만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었고 이 모든 역할들이 통합된 진실한 한 인간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강영택교수 / 우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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