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교가 된 '명동학교'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4월 02일(화) 09:12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10. 김약연 <1> 간도의 민족 지도자

김약연 / 출처 네이버

나라가 기울어져가던 구한말 한반도 너머 미개척의 땅 간도에서 마을을 일구며 민족정신을 되살려 조국의 등불을 밝히고자 했던 규암 김약연선생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규암 김약연은 1868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무관의 집안에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이북 출신 선비들을 관직에 잘 등용시키지 않던 시대적 불합리와 매관매직의 성행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 등을 목도한 김약연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결국 그는 마음 속에 그리던 이상적 공동체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함을 깨닫는다. 1899년 그의 나이 31살 때 김약연은 뜻이 맞는 다른 네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14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북간도의 회룡현 불굴라재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그곳 이름을 '동쪽 즉, 조선을 밝게 한다.' 하여 '명동(明東)'이라 하였다.

명동촌에 이주하여 집터와 농지가 정해지자 1901년 규암을 비롯한 각 가문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서당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기에 힘썼다. 그들이 처음 건설하고자 했던 이상촌은 교육을 통해 유교적 이념과 가치를 가르쳐 규범과 질서가 있는 마을공동체였다. 그래서 규암 역시 그의 집안 식구들이 사는 장재촌에 규암재라 이름 붙인 서당을 설립하여 한문과 한학을 가르쳤다.

규암이 규암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마을을 일구어가는 동안 명동촌 북쪽인 용정에는 이상설이 '서전서숙'이라는 신식학교를 세워 한학이 아닌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러다 이상설이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로 떠나자 서전서숙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 1907년 개교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긴 규암은 규암재를 비롯하여 명동촌에 있던 서당들을 통합하여 1908년 서전서숙의 정신을 잇는 명동서숙이라는 근대교육기관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서전서숙의 숙장이던 박정서를 명동서숙의 숙장으로 모셔오고 자신은 숙감으로 학교 일을 하였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처럼 국어, 수학, 법률, 국사, 윤리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을 하다 1909년에 학교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었다. 이즈음 학교는 점점 더 알려져서 학생 수가 늘어나 1911년에는 160명이나 되었고, 1912년에는 180명으로 증가했다.

1908년은 명동촌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규암이 설립하여 운영하던 규암재는 유교적 이념의 토대 위에 있었고, 명동서숙의 설립은 민족주의 이념의 기반 위에 있었다. 학교의 이러한 이념적 특징은 그들이 살던 명동촌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던데 1908년 학교의 이념적 토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즉, 기독교신앙과 정신을 학교의 주지로 삼게 되어 명동서숙은 기독교학교로 변모하게 되었다. 학교의 기독교학교로의 변화는 학교의 설립자인 규암의 기독교신앙 입문과 함께 일어났고, 이는 명동촌 주민들도 기독교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커다란 변화가 의외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재면이라는 교사의 초빙이었다. 명동서숙을 설립한 규암은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때 상동청년학원 출신이고 신민회 회원이었던 정재면이라는 사람이 민족정신이 투철한 애국자요 실력이 뛰어난 교육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재면은 규암으로부터 명동학교 교사로 올 것을 제의받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린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오랜 세월 유학자로 살아온 규암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동촌의 주민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 결과 훌륭한 교사를 초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08년 정재면이 명동서숙의 교사로 오는 것을 계기로 규암 역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명동촌의 다른 집안 지도자들도 규암과 같은 길을 걷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명동촌 한가운데 명동교회가 세워졌고 마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학교가 된 명동학교는 신앙적 토대 위에 더욱 안정되고 발전하여 당시 민족교육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던 평양의 대성학교와 정주의 오산학교와 함께 3대 사학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강영택 교수 / 우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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