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여성들, 신사참배 거부하고 신앙 지켜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9년 03월 26일(화) 09:37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9. 김필례 <3>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재건

1950년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7회 여전도회연합대회에서 김필례 정신여학교 교장(맨 앞줄 중앙)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 80년사

1938년 한국 장로교회 교단총회(제27회)는 일제의 집요한 신사참배강요를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총회를 굴복시킨 일제는 전국의 교회를 강제로 통폐합시켰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개신교를 일본 교단에 편입시킴으로써 한국교회를 해체시켰다. 1943년 5월에 한국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칭되었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교파들이 1945년 7월 19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으로 완전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장로교회를 끌어들였고, 교회로 하여금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도록 강요했다. 이때부터 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전쟁의 도구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장로교회 제28회 교단총회는 국방헌금을 걷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500원을 걷었다. 교회의 전쟁 물자 공급은 예배당을 팔아서 없애기까지 전쟁수행에 협력해야 했다.

그런데, 총회산하단체 장로교회 여전도회연합회는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에 순복하지 않고 여전도회의 총회소집을 미루며 공식 입장을 내어 놓지 않았다. 1940년 경상남도 여전도회연합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회의를 개최했을 때, 이 자리에서 회장 최덕지의 사회로 신사참배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다. 여전도회가 공식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여전도회가 교단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거부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1943년 한국 장로교회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칭된 이후, 여전도회연합회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지하로 숨어버렸다"(이효재). 이렇게 장로교 교회여성들은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최후의 버팀목이었다.

8.15광복 직후에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38선이 남한과 북한의 분단선으로 고착되어 갔다. 8월 말에서 9월 초순 사이에 소련군은 남한과 연결되는 철도, 전신, 전화, 그리고 우편을 단절시키기도 했다. 남·북한의 교류를 위하여 미군 사령부와 소련군 사령부의 회담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나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에서는 장로교 '5도연합노회'가 결성되었다, 또 남한에서는 8.15해방 직후 서울에서 '남부대회'의 이름으로 교단대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1946년 6월에 열린 장로교 총회(소위 '남부총회')가 교회를 재건하는 총회로 모였다.

같은 시기에(1946년 6월) 남한의 여전도회전국연합회도 제14회 여전도회 대회를 개최하였다(회장 신애균, 총무 김성무). 이로써 일제 강점기에 한시적으로 지하로 숨어 있던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지상으로 올라왔고, 또 전국의 지방연합회도 재조직되었다. 그 이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회장들의(14대 신애균, 15대 유각경, 16대 한영신, 17~20대 김필례) 헌신과 지도력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했다.

1950년대 장로교회 여전도회는 김필례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생존의 걸음을 힘겹게 디뎌 나갔다. 6.25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운영이 여러 모로 힘겨웠다. 여전도회의 재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상임 총무의 인건비조차 막연했는데, 회장 김필례의 노력으로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의 재정지원을 얻었다. 회장의 지도력으로 여전도회는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면서 '월례회인도책'을 발간하여 전국 지(支) 교회의 여전도회가 정기적으로 모이도록 했다. 또 1956년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회가(會歌)'를 제작하여 회원들이 단결력을 집중시켰다. 여전도회의 지방연합회를 배가시켜서 13개에서 26개로 늘어나게 했다. 여전도회는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교회여성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197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필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녀는 93세의 일기로 1983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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