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학생들 배려…구국계몽활동 앞장
[ 3.1운동100주년기획 ]
작성 : 2018년 10월 30일(화) 17:05 가+가-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3. 남궁억 <2> 생애와 모곡학교

강원도 홍천에는 한서 남궁억이 설립한 모곡학교(모곡예배당)가 복원돼 있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무궁화를 심게 한 데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34년 5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판사 마스무라 후미오가 모곡학교의 설립과 운영 방법을 묻자 남궁억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학교 설립 당시의 아동은 830~840명 정도이었다. 그렇게 해서 3, 4년 경영하다가 그 무렵부터 미국 선교부에서는 학교의 유지비를 보낼 수가 없게 되어 나는 조선에 있는 내 친구나 아는 사람을 방문하여 5000~ 6000원쯤 기부금을 모아서 그 돈으로 토지 및 임야를 사서 그 곳에서 나오는 수확과 아동 1인에게서 40전씩 징수하는 월사금으로 오늘까지 학교를 계속해 왔는데 현재 아동은 100명 내외가 있다."

처음에는 남궁억이 속해 있는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가 모곡학교의 설립비와 교사의 월급을 지원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경제공황으로 지원비가 격감하더니 1930년경부터는 이마저 끊겼다. 다수의 학생들이 수업료조차 못 내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학교운영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남궁억은 지인들로부터 5천여 원의 기부금을 모아 토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무궁화 묘목을 심었다. 학생은 물론 월사금, 즉 교육비를 내지 못하는 학부형으로 하여금 이를 재배하게 하여 월사금을 해결하게 하였다. 무궁화 묘목을 재배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돈이 없어 교육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남궁억은 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에서 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 씨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이사람 저사람에게 자식 공부를 부탁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일까? 남궁억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관립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 들어가 1884년 수료하고, 서울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 내부 주사(主事), 1889 칠곡 부사, 1893년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종로와 남대문 일대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그러나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서재필·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후 '중추원'을 개편하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설,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이러한 의회설립운동은 수구파의 모함으로 실패했고, 1898년 11월 5일 남궁억은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898년 설립한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1900년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분할점령설'과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맺은 '러일협정'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속되어 4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05년 3월 성주 목사, 1906년 2월 양양 군수로 임명되어 시무하다가 1907년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고, 1908년 4월에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교육월보'를 발행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10년 기독교인이 되어 동년 10월 남감리교 계통의 학교인 배화학당의 교사와 1912년 미감리회 상동교회가 운영하는 상동청년학원 원장에 부임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8년 건강이 악화되었으므로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들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1919년 9월에 모곡학교를 설립하였다.

최태육 박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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