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와 행위 심판(마 7:15~27)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4월 13일(수) 05:54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8
산상수훈의 마지막 대목은 세 가지의 비유로 짜여 있고 그 공통 주제는 종말 심판이다. 그 심판의 핵심 요체는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우는 것, 그에 따라 잘못 행하여 제 몫의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화자는 세 가지의 비유와 예시를 제시하는데 그 첫째가 나무와 열매의 비유이고(7:16~20), 둘째는 종말 심판의 예시이며(7:21~23), 셋째는 두 건축의 비유이다(7:24~27). 이 세 가지 교훈의 공통 전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거나 그릇된 의도로 가르치는 거짓선지자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7:15). 그들은 구약성경에서도 경고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이 위험한 것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제자나 신자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임수는 양의 옷을 입고 이리처럼 행세한다는 우화적 표현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쳐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을 이용하여 '노략질'하는 대상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가르침이 정확하지도 않고 순정할 리도 없다.

그러면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여부는 어떻게 구별하고 그 선생이 거짓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는 또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이어지는 본문의 세 단락을 종합해보면 그 기준은 삶의 열매, 곧 그 삶의 실천적 행위를 통한 어떤 선한 결과의 유무에 달려 있다. 이 선명한 기준은 세 가지 비유와 예시에 각기 행함을 강조하는 산상수훈의 구원론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먼저 "열매를 그들을 알 것"이라는 선언은 나무의 비유와 직결되는데 이는 그 나무의 성정에 걸맞게 모든 열매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이미 섭리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끔 돌연변이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즈음 다양한 접붙임을 통해 종자를 개량도 하고 신품종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유사한 수종끼리 붙여야 가능한 일이지 가시나무 유전자를 아무리 조작해도 포도나 무화과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는 뭇 생명들에게 유익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처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일 텐데 여기서 우리는 식물과 인간의 차이에 유념해야 한다. 자신의 종자를 바꿀 자유의지와 결단의 역량이 없는 가시나무나 엉겅퀴와 달리, 사람은 그 마음을 돌이켜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좋은 재목으로 스스로를 양육하며 훈련할 의지와 잠재역량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소멸의 불구덩이로 던져지기 전에 얼마든지 개과천선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21절부터 두 번째 예시로 제시된 최후 심판의 경고는 스스로 올바른 길을 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어긋난 길을 가면서 자신의 열매를 과시하는 잘못된 행실에 대한 오해를 교정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이 경고의 말씀에 대해 학계의 일각에서 주의 이름을 복창하듯 불러대며 입술로 고백하는 데만 머물며 자기 편의주의의 함정에 빠진 어떤 이방인 기독교 그룹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자랑하던 행실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자부한 부류와 관련되어 있었다. 축귀나 초월적인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이로써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던 어떤 종교장사꾼이 이 맥락에서 연상된다. 실제로 1세기 지중해 연안에는 상당한 규모로 사업화된 종교적 기적술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들은 마법적 주술을 통해 유대교와 이방 종교계 안팎에 번성했으며, 훗날에는 기독교 내에도 틈입하여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실이 아무리 대중적 관심을 끌고 인기를 구가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위해 특정 대상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거짓선지자로 분류되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4~27절에 제시된 두 건축의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행위가 어떤 밑바탕에 뿌리박혀 있는지 주의를 환기한다. 요컨대 토라의 전통에 대한 권위 있는 스승인 예수의 해석적 기초 위에 그 정통의 교훈을 받아들여 순종할 때 비로소 참된 행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비유에 의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의 길이다. 반면 이와 무관하게 세상의 허탄한 소문이나 거짓선지자의 그릇된 미혹에 빠져 말씀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길로 들어설 때 그것은 모래 위에 부실하게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의 길이 된다. 평상시에는 잘 분간하지 못할지라도 홍수와 폭풍 같은 외적인 도전이 닥치고 환란이 임하면 그 결과는 확연하게 갈라진다. 하나는 견고하게 서지만 다른 하나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종교적 환경에서 강조되는 선행은 낡은 옳음의 명분에 집착하는 아집을 양산하여 '자기 의'라는 함정을 만들기 쉽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정초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인간의 심리적 안위와 편리를 위한 자기봉사적 마법장치로 퇴락시키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진지한 삶의 실천과 구도적인 탐구의 노력이 생략된 채 이른바 '값싼 은혜'의 미끼를 덥석 물고 그것을 진리의 총화로 여기는 소아병적인 자세가 그것이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이러한 동시대적 병통에 도전한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자들마다 예수의 진지한 제자도를 결행해야 할 의무를 짐지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생존에 견고한 지침으로 작용하여 더불어 풍성한 삶의 열매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 외화내빈의 시대에 기독교조차 대중의 환호에 물들어 헛된 영광의 외피에 들뜨곤 하는 세태를 반성하기에 적실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강조하고 행함을 중시하는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다들 눈떠야 할 때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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