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로서의 제자도, 황금률, 좁은 문의 교훈(마 7:7~1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4월 06일(수) 06:41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 17
이 문단은 세 가지 세부 단락의 어록을 종합해서 다룬다. 이는 각기 따로 세부적으로 해석하면 매우 광범위하고 깊은 토론 주제가 되는데 지면관계상 뭉뚱그려 조명하고자 한다. 먼저 7:7~11의 어록은 흔히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응답해주신다는 의미의 교훈으로 풀이하는데 이는 이 어록의 핵심 메시지와 다소 거리가 멀거나 그 적용 맥락이 너무 좁다. 여기서 핵심 어휘로 사용된 '구하다'(aiteo)와 '찾다'(zeteo)는 '질문하다'와 '탐구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감추어진 비밀이 많다. 그 나라에 제자로 참여하는 자는 당연히 그 비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적극적인 탐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각종 질문의 행위로써 표출되며 그것이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것을 매개로 제자로서 '배움'의 자리에 입문하게 된다. 이러한 공부와 탐구의 과정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비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담백한 낙관주의의 신앙이 요청된다. 그것은 질문을 동원하며 진리를 찾고 탐구하는 자에게 그 답이 이 세상만물과 인간역사에 풍성한 비밀을 숨겨두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리라는 긍정적 신뢰의 자세와 연결된다. 문을 두드리는 비유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두드리는 문은 간혹 닫혀 있거나 그 안에 사람이 없어 열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목적을 가지고 두드릴 때 십중팔구는 열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담백한 낙관주의와 긍정적인 구도자의 자세 가운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는 담백한 결론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이어지는 8~11절은 하나님과 그 자녀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이 땅의 나쁜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 빗대어 하나님이 그 자녀를 얼마나 선대하며 그 진지한 탐구의 노력에 얼마나 흔쾌하게 보응하시는지 논증하는 비유적인 설명이다. 나쁜 아비라도 그 정도는 하는데 하물며 우리 생명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극진하게 우리를 잘 대해주시겠냐는 논조다.

황금률로 알려진 12절의 어록은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엇이든지 해주기를 너희가 원한다면 그 모든 것을 너희 또한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여라." 여기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욕망하는 존재로 전제된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도 그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그것을 행하라는 적극적 상호주의의 교훈이 이 황금률에 담겨 있다. 이 적극적 상호주의는 기계적 상호주의와 달리 자신이 남들에게 선한 것을 베풀었는데 그것이 비슷한 수준의 좋은 보답으로 되돌아오기보다 이른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식의 손해를 무릅써야 하는 제자도의 선택지이다. 그래서 황금률은 모험적 신앙의 용기 아니면 실천하기 쉽지 않다. 이 황금률은 단지 직전의 7~11절에 대한 결론구가 아니라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이라 할 정도로 그 위상이 중요하다. 산상수훈의 제자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배려하며 예수의 천국 복음을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며 전파해야 하는 황금률의 원리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구라도 먼저 마음을 열고 뜻을 펼쳐 호의와 선대의 손짓을 보내지 않으면 상대방과의 아무런 유의미한 관계가 성립되기 어려운 상황도 고려된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또한 이러한 상호주의의 원리에 따라 맺히기도 하고 풀리기도 한다는 이치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의 '좁은 문'과 '좁은 길' 어록(7:13~14)은 제자도의 삶이 황금률의 이치에 반영된 대로 만만치 않은 곤경이 예상되는 험난한 여정임을 암시한다. 그 두 문과 두 길은 고대의 문헌에서 대조적인 삶의 두 방식을 빗대어 상용되는 메타포인데 그 내포적 함의는 극적으로 상이한 결과로 드러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이 세상의 주류가치와 대중의 유행을 쫓는 삶의 방식이다. 거기에는 무질서와 혼란, 탐욕을 빌미로 한 아귀다툼의 무한경쟁과 불행한 파국이 예고되어 있다. 반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좁은 길은 자기희생과 헌신이 요구되고 이 세상의 주류가치와 길항하는 결기어린 긴장과 저항이 그 비용으로 요청된다. 때로 악한 시험과 싸워야 하고 치명적인 손실도 감내해야 한다. 자신의 호의와 은혜로써 선대한 것이 뒤통수를 치는 배반으로 돌아오는 현실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궁극적으로 승리의 길이고 행복의 길이다. 그 협착한 길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가야 하는 것이 바로 천국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도의 길이고 그 삶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의 길, 역경의 여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제자도의 구도자적 삶이 진리 탐구와 진리 실현의 길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보배로운 진리는 많은 경우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안이한 방종의 삶, 이기적인 탐욕적 자세로는 그 문을 열 수 없고 그 길을 개척할 수 없다. 십자가의 구원 사건 가운데 모든 진리가 완성되었다고 믿은 고대의 교부들은 그래서 예수의 이러한 어록을 난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십자가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그를 통해 전파된 천국 복음이 이 땅에 온전히 이뤄지기까지 저 황금률의 원리를 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제자도의 삶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담백한 낙관주의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해답을 신뢰하며 꾸준히 탐구하는 구도자로서의 적극적 자세를 포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 그리로 들어가 그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비용과 대가가 있다면 그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기꺼이 감내하는 용기와 결단이 중요하다고 교훈한 것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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