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고 신중한 처신에 대하여(마 7:1~6)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3월 30일(수) 16:21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16
이 문단은 두 개의 소단위 어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첫째의 어록은 7:1~5의 본문으로 형제를 향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이어서 나오는 7:6의 둘째 어록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대에게 그것을 제공하여 수치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현명한 처신의 교훈을 비유적인 언어로 담아낸다.

먼저 첫째 어록에서 우리말 개정개역의 '비판하다'라는 표현은 번역상의 결핍이 탐지된다. 여기에 사용된 원문의 희랍어 단어는 '크리노'(krino)로 본래 '정죄의 의도로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판단하다'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우리 말 '비판'이라고 번역하면 생산적 비판, 학문적 비판 등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비판의 의미론적 범위를 다 포괄하는 게 되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두 눈은 바깥으로 그 시선을 발산하므로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의 외형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내면 또한 자기 스스로 가장 잘 알고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준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자기폐쇄성은 오히려 그 내면의 시선을 맹목으로 만들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희미한 반면 바깥을 향한 비판의 시선은 과도하게 날카롭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 어휘와 함께 등장하는 '헤아림'(metreo)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도량형의 단위로 사물의 길이를 측량하는 행위인데 그 기준이 대상에 따라 들쑥날쑥하면 신뢰할 수 없고 당연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과 '측량'의 행위가 더 심각한 것은 그 대상이 본문에 의하면 한 공동체 내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보호하고 돌보며 함께 협력해야 할 신앙적 우애의 동반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떤 허물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이것을 꼬집어 지적하며 심판자의 위치에서 공격적 언사를 남발한다면 그 신앙적 우의는 손상을 입고 관계는 절단나기 쉽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공동체 내의 형제/자매를 향해 정죄어린 심판적 언사를 남발하는 게 부당하다고 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는 윤리적인 이유로 자신의 내면에 가려진 '들보'와 같이 큰 허물은 마치 없는 것처럼 외면한 채 상대방의 '티'와 같이 작은 허물은 적발하여 큰 것인 양 과장하는 것이 온당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와 시각에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근간이 되는 자아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예수께서는 형제의 티를 예민하게 적발하는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편향된 시각을 지적한 것이고, 그것이 '외식', 곧 위선과 결부된 불온한 의도를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들보'와 '티'의 비유는 곧 명령형 문장으로 이어져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5)는 말씀과 함께 무엇이 더 우선인지 설파한다. 상대방 형제를 향한 내 시선의 부정확함이 그 시선을 가리는 내 속의 더 큰 허물에서 연유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통찰한 것이다.

둘째는 신학적 이유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심판의 대상인데 그 중에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해 다른 누구를 심판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죄의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선의의 비판이라도 그것이 자주 남발되다 보면 관성이 생겨 나 자신은 항상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당연한 양 착각하기 쉽다. 그때 그 비판은 근거 없는 비난과 험담으로 흐르기 쉽고 상대방의 허물이나 오류는 정도 이상으로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대상인 인간을 심판자인 양 오판하게 만드는 심리적 배경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피조물을 향해 유일한 심판관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 반역의 기운을 조장하기 마련인데 예수께서는 그 함정을 또한 신학적 맥락에서 경계한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7:6)는 이어지는 어록에서 해석의 관건은 '개'와 '돼지', '거룩한 것'과 '진주'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이다. 오래 전 '거룩한 것'과 '진주'를 성례전적 맥락에서 해석하여 성만찬에서 분배하는 떡과 포도주로 보고 '개'와 '돼지'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불신자, 태신자 등의 범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상수훈 전체가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매뉴얼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이 어록은 그들이 이 세상으로 파송받아 사람 낚는 어부로서 선교적 사명을 실천하는 현장의 만만찮은 현실을 감안해 보다 현명하고 신중한 처신을 종용한 메시지로 새겨진다. '거룩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무슨 성물이든, '진주'가 자신이 가진 어떤 유형의 소중한 자산이든, 그것은 거룩하고 또 소중하게 취급받는 것이 온당하고 남들에게 베풀어질 때도 그 진가를 인정하며 감사하게 받을 만한 대상에게 제공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물이 쓰레기로 전락하고 그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도 불필요한 피해를 입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분별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훈련이 제자들에게 필요하고, 자신의 힘과 땀이 투여된 소중한 가치가 허투루 낭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명한 자기에의 배려가 요청된다. 예수께서도 그러셨지만 사도 바울도 평생 헌신하며 노력한 선교의 일들이 열매 없이 헛수고로 끝나 그 공생애의 종국이 헛되이 드러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흔적이 짙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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