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구제의 교훈(마 6:1~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작성 : 2022년 02월 16일(수) 13:36 가+가-
산상수훈의 보화를 찾아서10
마태복음 6:1~18에서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내용은 그 문헌 양식상 '제의적 교훈'(cultic didache)의 범주로 분류된다. 그 신학적 유형으로는 당시 유대교에서 중시한 경건의 3대 요소인 구제와 기도, 금식을 핵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3대 요소는 고대의 랍비 유대교 문헌 중 피르케 아봇(Pirke Aboth)에서도 똑같이 규정되어 있다. 그중에서 상기 본문은 그 첫째 항목으로 구제를 다루고 있다. 구제(almsgiving)는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미덕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이웃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주는 선행이다. 이 세상의 타락한 현실 속에 아무리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고 탁월한 정책이 시행되어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담긴 선한 뜻대로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재화가 골고루 분배되어 모든 인간이 균등하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 전혀 모자람 없이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선한 창조의 뜻에 부응하는 그 백성의 신실한 참여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원사를 이루는 긴요한 실천 요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종교인들이 이러한 경건의 실천조차 자신의 인정욕구를 채우는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하여 구제의 본질을 오염시키고 선행을 빌미로 오히려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동참하기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를 하는 것은 이러한 위선의 행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식' '위선'으로 번역되는 헬라어(hypokriton)는 본래 '연극배우'를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연극배우는 자신의 속내와 무관하게 꾸며진 연출된 무대에 맞추어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사람이었고, 오늘날 배우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종교적 맥락에서 그것은 표리부동한 짓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경건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다. 당시 유대인들이 구제라는 경건의 외피를 입혀 행하는 이런 짓은 기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나팔을 불며 선전하는 행태로 드러났다. 이런 일을 금한 예수의 말씀은 그것이 경건의 본질에 역행하는 오도된 짓이라는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이러한 공개적인 구제행위로 자신의 선행을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경건의 실천이 질타의 대상이 되는 걸까. 그것은 어찌 보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건강한 인간의 생래적 욕망의 발로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이 은밀한 구제의 교훈은 다음의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깔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전제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은밀한 구제를 포함하는 모든 행위를 은밀한 중에 감찰하시며 두루 파악하시는 분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구약의 지혜신학으로 소급되는데, 가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전 3:11)는 통찰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이 당당하게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확연하게 당신의 백성 앞에 당신을 드러내며 계시하는 방식으로 구원사를 이끌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이렇게 고요하게 은밀한 중에 만유 가운데 만유와 함께 만유를 통치하시면서 구원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하나님의 은밀한 성품 역시 하나님의 온전함 중의 일부로서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며 따르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은밀함을 닮아 구제라는 선행 역시 은밀하게 하는 것이 정당하리라는 신학적 논리가 여기서 파생된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에게 그 구제의 선행을 드러내고자 나팔을 불고 자신의 인정욕구를 성급하게 충족시키며 칭찬을 받으려는 행위는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그 선행의 영광을 자신이 미리 가로채면서 하나님 몫의 영광을 사람들의 칭찬으로 대체하는 불상사를 초래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통한 자기 명성의 추구가 하나님의 몫을 대신하는 것은 불경이다. 경건을 실천한다면서 그 결과가 불경으로 드러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재앙이겠는가.

셋째, 이 교훈 속에는 당시 유대교에서 중시된 보상신학의 쟁점이 맞물려 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자신의 구제를 선전하는 짓은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아서 하나님 앞에 별도의 보상을 받을 게 없다고 결론짓는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것은 병치하거나 대치될 수 없다는 논리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선행에 대해 장차 현세 아니면 내세에서 종말론적 차원의 보상을 해주시는 분으로 여기서 전제된다. 다만 그 조건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하게 실천할 때에 한정된다.

만인 앞에서 만인의 자기 홍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온라인/오프라인 각종 매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몸값과 상징가치를 높이기 위한 무한경쟁의 파노라마가 오늘날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이 세상의 현실이다. 교회도 그 각축장에 뛰어들어 각종 선한 사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 영광을 선취하려는 조갈증으로 안달이 날 정도다. 드러난 것만 값어치 있고 그 속에 감춰지고 숨겨진 부분은 망각 속에 묻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양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며, 동시에 반대로는 가볍게 칭찬하고 추켜세우기 일쑤이다. 이 모든 경박한 현상이 신앙적 부조리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은밀함을 매장한 지독한 무신론의 현실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차정식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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