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구심점이 된 김마리아
[ 선교여성과 교회 ]
작성 : 2021년 04월 22일(목) 09:00 가+가-
김마리아 리더십 소고 ④

보라매공원의 김마리아 동상. / 한국기독공보DB

앞서 살핀 생애에서 김마리아는 일본유학시절, 국내 독립운동시절, 망명시절, 그리고 귀국 후 활동 속에서 매번 여성모임에 관여해 조직을 재편 혹은 설립해 발전시켜나갔다. 여성들은 김마리아를 구심점으로 일제 통치에 대한 여성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이는 김마리아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장로교여전도회의 조직과 관계해 회장으로 이 모임들을 유지 발전시켰다.

김마리아가 기독교계 학교인 동경여자학원에 유학할 당시 일본에는 340~350명 가량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은 '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7단체가 1913년 다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기관지 '학지광'을 창간했다. 학우회는 친목단체로 발족해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했다. 조선유학생학우회는 '학지광'을 매해 600~1000부를 발간해 국내외에 배포하는 등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 조직은 남녀차별은 인식하지 못한 채 남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따라서 재일 한인 여자유학생들은 1915년 4월 3일 '조선유학생학우회'와는 별도로 여자 유학생들 간의 친목 도모와 여성교육, 여성해방 등 이상적 여성의 삶을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했다. 김마리아의 고모인 김필례가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1916년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기 위해 귀국하게 됐다.

이에 1917년 10월 17일 회원 전원이 출석한 임시총회에서 김마리아가 김필례를 이어 회장으로 선임됐고, 임원으로 총무에는 나혜석, 서기 정자영, 부서기 김충의, 회계 현덕신이 선출됐다. 김마리아를 구심점 삼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우선 김마리아는 동경에 친목회 본부를 두고 일본 각지에서 유학중인 여자 유학생을 규합하여 지회를 설립해 동경뿐만 아니라 조직의 범위를 확대시켜 회원이 1917년 9월부터 1918년 봄 당시 동경에 9명, 총 회원수는 40여 명으로 늘었다. 또한 요코하마 등 동경과 가까운 지회는 친목회 총회에 참석케 해 연대를 강화했다.

또한 김마리아는 잡지 '여자계'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로 만들었다. 여자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여자계'는 일제하 최초로 간행된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잡지였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찬사가 보내졌다.

'여자계'의 발행을 위해 여자유학생친목회는 자진해 기부금을 냈고, 본국에서도 숭의여학교 동창회가 50원을 기부하는 등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이 들어와 회원들에게 이 잡지를 배포할 때 대금을 받지 않았다. 김마리아의 지도력과 회원들간의 강한 유대로 이 조직은 단순한 친목을 넘어 여성운동을 위한 큰 조직체로 발전했다.

김마리아가 1917년에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활동한 후 실제로 이 조직은 김마리아의 조직력, 통솔력 등으로 규모있는 조직체가 됐고 따라서 이 조직은 일본 유학생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특히 김마리아는 친목회를 중심으로 "황에스더, 나혜석 등 여자 유학생 사이에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과 요코하마의 정신여학교 후배 차경신을 비롯, 정경애, 김정송 등 유학생들과 깊은 유대를 가졌으며, 이광수, 정영택 등 동경 유학계의 대표적 인물과 상당히 깊은 인적 연대를 가졌다."

김마리아의 지도력으로 모인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9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웅변대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으로 30원의 운동비를 내놓았다. 여자유학생친목회를 통해 김마리아는 그의 운동체 조직, 운영과 지도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마 그녀가 2.8독립선언 이후 귀국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이끌어가는 바탕이 됐을 것이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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