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의 효(孝) 사상
작성 : 2019년 06월 05일(수) 10:00 가+가-
조선의 22대 국왕으로 본명은 이산이며, 1752년 9월 22일 새벽 2시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위는 1776년~1800년까지 집권하였으며 1758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759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명으로 사망하였으며, 1764년 조부인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양자로 입양되어 1765년에 동궁에 책봉되었다.

영조가 사망하자 왕위에 오름으로 1776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였으며,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추숭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 사당을 복구하고, 홍국영에게 승지와 숙위소대장직을 맡겨 친위세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1779년 원빈 홍 씨의 죽음을 애도하여 손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을 썼다. 이것은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직접 쓴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 한다.

또 1781년 규장각을 만들어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1789년 장헌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에 화성을 축성하였다.

건국과 함께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설정한 조선왕조에서 누구보다 효를 실천한 왕으로써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 하여 조선 선비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실천한다면 그 어떤 사회보다 올바르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의 모든 백성에게 효심을 알리기 위해 오륜행실도를 만들어 유교에서 효를 알렸으며 '부모은중경'을 모든 가정에 보급하여 불교에서의 효행심을 널리 알렸다.

여기서 오륜행실도란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종합판이다.

1797년(정조21) 정조의 명을 받아 심상규(沈象奎, 1766~1838), 이병모(李秉模,1742~1806) 등이 세종 대의 '삼강행실도'와 중종 대의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수정하고 정리자(整理字)로 처음 간행되었고, 그림을 활용한 행실도가 겨냥한 독자층은 아동이라든가 여성, 일반 백성이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효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작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책의 첫머리에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있고 총 105명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총 5권으로써 1권에는 효자 33명, 2권에는 충신 35명, 3권에는 열녀 35명, 4권에는 형제간 우애가 극진한 24명과 부록으로 종족(宗族) 간에 화목한 7명, 5권에는 친구간의 도리를 다한 11명과 부록으로 스승과 문하생간의 도리를 다한 11명의 기사가 실려 있다. 수록된 인물이 대부분 중국 사람인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7명, 열녀 6명 등 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실려 있는 사례를 보면 정몽주의 이야기 '몽주운명(夢周殞命)',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잡아 복수한 고려 때 수원에 살던 최누백의 이야기 '누백포호(婁伯捕虎)', 개루왕의 겁박에 굴하지 않고 눈먼 남편을 따라 함께 도망간 백제의 열녀 도미의 아내이야기 '미처해도(彌妻偕逃)' 등이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가 있다.

정조가 1789년 7월 15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의 배봉산(지금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수원으로 옮기는 것을 결정한 이유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으로 모시고자 하는 효심 때문이었으며, 수원에 화성을 쌓은 이유 중 하나가 어머니 혜경궁이 70세가 되면 정조대왕이 스스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려 했다는 사실을 보며, 효심이 지극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조희석 안수집사/수원성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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