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55년사/ (19)6.25전쟁과 좌익의 득세
[ 교계 ]
작성 : 2001년 06월 23일(토) 00:00 가+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기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수원으로 옮겨갔으며, 이 대통령은 "서울을 사수할 터이니 안심하고 계십시오"라고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방송했다. 이튿날 서울거리는 피난민으로 가뜩 메꿔졌으며, 이미 국군이 지키고 있던 의정부는 적에게 넘겨주었고 창동쪽 역시 인민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대포 소리도 점점 서울 한복판까지 울려퍼지고 있었고 부상병들도 속출했다.
한편 그렇게 서울과 교회를 사수해야 한다던 목사들은 어느새 짐을 챙겨들고 누가 볼까 말없이 피난행렬에 가담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탄압에 경험이 없었던 이남 목사들은 "설마 같은 동족인데 무슨 일이야 있을까"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피난을 포기해 버리기도 했다.
더욱이 6월 28일은 왜 그리 비가 쏟아지는지, 같은 민족이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내민 이 민족상잔의 비극을 원망하면서 하나님도 슬피 우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에 인민군들은 불을 뿜는 탱크를 앞세우고 뒤에는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은 승리에 도취돼 유유히 서울로 입성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기마병까지 동원됐다. 어느새 자신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듯이 인공기를 앞세우고 인민군을 환영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기독공보 기자들은 넋을 잃은 채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곳곳에서 과거 좌익운동을 했던 보도연맹 출신들은 '인민군환영' 이란 피켓과 함께 현수막을 거리에 걸기 시작했다. 3.1독립선언 대표의 33인 중 한사람이었던 김창준목사(북한 최고인민상임위원)는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나타나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남선기독교민주동맹'이란 단체를 조직, 위원장의 직함을 갖고 피난가지 못한 목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무총장은 김욱으로서 김종대목사와는 전주성경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욱은 평소에 잘알고 지낸 현동완 전YMCA 총무를 만나 '기독교인민군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맹측에서는 장로교는 최문식목사, 감리교는 최택이로 하여금 교단 책임자를 만나 설득하기로 했다.
이들은 각 교단별로 인원을 동원할 수 있도록 대표자를 선정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유호준, 김종대, 감리교회에서는 박만춘, 심명섭, 구세군은 황종률목사 등이 선정됐다. 이들은 태평로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가 그들과 접촉을 하면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인민군환영대회'를 개최하자고 강력히 요구했다. 위압에 눌렸던 각교단 대표들은 인민군환영대회를 7월 9일 중앙감리교회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들은 피난가지 못했던 모든 목사들에게 연락하고, 이 날 중앙감리교회에서 모인 모임에 대해서도 교회에 알리기로 했다.
드디어 '인민군환영대회'가 예정대로 모이게 됐다. 이 날 교회 정문에는 어느새 '인민군환영대회'라는 현수막이 따갑게 내려 쬐는 태양열에 힘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교회당안 강대상 뒤에는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버티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종로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날 식장에 나타난 목사 일부는 두고두고 이를 후회하기도 했다.
행사 중 환영사를 맡았던 유호준목사(총회 총무)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불참하고 2명의 장로만 참석했다.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장로교의 몫이었던 환영사를 담당했던 유호준목사가 나타나지 않자 할 수 없이 김종대목사가 대신하게 됐다. 대회가 끝나고 좌익계 목사들은 식에 참가했던 목사들을 상대로 자술서를 받기 시작했다. 자술서를 강요한 좌익계 목사들은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하는 듯이 목사들을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였고, 지방에서는 내무서원들이 목사의 자술서를 챙기고 있었다.
김 수 진/목사·교회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