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에 윤리는 정지될 수 있다
[ 인문학산책 ]
작성 : 2021년 04월 27일(화) 11:13 가+가-
14.창세기 22장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3)쇠렌 키르케고르

덴마크 코펜하겐 왕립도서관 정원에 있는 키르케고르 동상

어떤 경우에도 윤리적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는 레비나스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 사람은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약 100여 년 뒤에 태어난 레비나스가 자신과 정반대의 주장을 할 것이라 알 수 없었던 키르케고르의 가장 큰 적수는 당대 철학의 거인 헤겔이었다.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헤겔의 관념론은 철학을 인간 개인의 실존과 동떨어진 사변의 바다에서 헤매는 결정적인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사변철학으로 인해 19세기 유럽의 기독교 신앙은 지성인의 교양이나 윤리 정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특히 이성의 한계 내에서 종교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던 당시 철학자들(특히 칸트나 헤겔)에게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농후하게 전개되어 지나치게 자연주의적 신학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워했던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본질은 이성을 뛰어넘는 '역설'(paradox)에 있음을 역설(力說)한다. 키르케고르는 '천재와 사도의 차이점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천재는 내재의 영역(the sphere of immanence)에 속해 있는 반면 사도는 초월의 영역(the sphere of transcendence)에 속해 있기에 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키르케고르는 서구철학의 오랜 주제였던 신앙의 영역을 자아 이해의 중요한 축으로 다시 세운다. 그것은 바로 신 앞에 선 개인의 실존인 초월의 영역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 주체의 경험과 의식을 관념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헤겔 철학에 반대한다. '나'라는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실존의 언어, 특히 신앙이 결정적인 요소임을 주장한다. 종교적 실존을 통한 바른 자아 이해는 필연적으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해석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진리를 찾는 것은 바로 '나'이다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이란 저서는 신앙에 기초한 주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책의 저자를 실명이 아닌 요하네스 실렌티오(침묵하는 요하네스라는 뜻)라는 가명으로 출간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당혹감을 이렇게 묘사한다. 누가 아브라함의 팔에 힘을 주었는가? 누가 그의 오른손을 치켜올려 그것이 그의 옆구리에 힘없이 늘어지지 않게 했는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은 온몸이 얼어붙는다. 누가 아브라함의 영혼에 힘을 주어 그의 눈이 흐려지지 않게 하고, 이삭도 수양도 보지 못하게 했는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은 앞이 캄캄해진다.

아들을 죽이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공포와 전율에 빠진 아브라함의 모습은 신앙이 지식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반합을 통한 의식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도약'이 필요하며 이 도약은 논리를 뛰어넘는 실존적 결단이다. 신앙을 위한 도약을 보여준 인물이 아브라함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리는 '신앙의 아버지'로 부른다. 가짜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자기가 가진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가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증스러운 해석이다. 요하네스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로 칭하는 것인가?

만약 아브라함을 살인 미수범으로 단죄할 수 없다면 자신의 행위를 그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다. 한밤에 아들을 죽이라는 음성을 듣고 깨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음성이 아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니 나는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면서 이 시험을 통과해야겠다" 생각할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을 신앙의 아버지로 보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가 어떻게 생각했든 자신의 결단으로 그 모든 일을 실행한 것이다. 즉 개인이 모든 권한의 근원이며 나의 결정과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해석은 20세기 실존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율과 공포' 책표지
하나님은 윤리와 규범도 정지시킬 수 있다

주체가 결단하는 신앙의 도약은 이성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신 앞에서는 지극히 합당한 역설이다. 이 역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는 '신앙의 기사'(a knight of faith)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기사는 모든 실존의 불합리성과 우연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초월적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 윤리마저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윤리의 목적론적인 정지"(a 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론적인 정지"란 윤리보다 더 높은 상위의 목표, 이를테면 신의 부르심이나 초월적 존재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이루어지는 윤리와 규범을 초월한 행위를 일컫는다. 윤리는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기에 초월적 신성의 부르심 같은 상위의 목표를 위해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신앙은 지적인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신에 대한 복잡한 증명도 부질없는 것이며 신앙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는 무신론적 비판도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 신앙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과의 고독한 씨름을 견디는 자만을 위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키르케고르의 신앙에 대한 정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실존적 측면을 잘 부각시켜 주었지만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바로 광신(狂信)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의 신앙은 쉽게 반사회성에 빠질 위험을 지닌다. 각종 이단, 사이비 종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항상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더 높은 가치나 이념을 추구하며 무수하게 개인을 짓밟고 희생시킨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아무리 신앙인이라고 해도 '더 높은 부르심'을 오남용할 수 있는 위험성은 늘 상존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해주는 이성을 뛰어넘는 신앙인의 실존적 결단은 신앙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소통 불가한 극단적 반사회성은 많은 사람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많이 본 뉴스

뉴스

기획·특집

칼럼·제언

연재

우리교회
가정예배
지면보기

기사 목록

한국기독공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