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작성 : 2021년 01월 21일(목) 10:30 가+가-
<22>전쟁에 대한 태도 논쟁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는 노래 가사처럼, 인류는 언제나 평화를 염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바라볼 때, 과연 전쟁과 폭력이 없이 지나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의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전쟁관을 단순화해 표현하자면, 콘스탄티누스 이전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시기에는 대체로 평화주의 입장을 지지했고,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국가 시기에는 정당전쟁의 주장을 널리 받아들였으며, 교황권이 절정에 이르렀던 중세 전성기에는 십자군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런 다양한 입장들이 뒤섞여 서로 복잡한 논쟁을 벌여왔다.

#평화주의

평화주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예수께서 이 땅에 나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노래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셨고, 가르치셨고,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과 가르침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의 소명과 사명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이러한 평화주의 전통은 한동안 약화됐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하는데, 바로 에라스무스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개혁자들을 통해서였다. 에라스무스는 '평화의 탄식(1517년)'에서 평화를 의인화해 세상 어디에서도 평화를 찾아볼 수 없음을 탄식한다. 특히 성직자, 수도자, 신학자마저도 전쟁을 선동하며 앞장서고 있다고 질타한다. 그는 주교관과 전투모, 목자의 지팡이와 군인의 창, 복음서와 방패가 도대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온 세상을 전장으로 만들면서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이라며 인사할 수 있는지, 평화와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를 어떻게 죽고 죽이는 전쟁의 군기로 사용할 수 있는지 탄식하며 묻고 있다. 16세기에 등장한 아나뱁티스트도 무저항 평화주의를 자신들의 삶과 사상의 준거로 삼았다. 무저항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이들은 스위스형제단,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와 같은 여러 분파를 이루게 된다.

#정당전쟁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가의 종교가 되자, 전쟁을 치를 국가의 정당한 권위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정당전쟁 이론이 등장했다. 고대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로 인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정당전쟁론을 주장했다. 중세 시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요청할 때 정당한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도 수도사나 성직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중기준을 내세웠다. 교회개혁자 루터도 '군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1526년)'라는 문건에서 '군인도 은혜의 나라에 있을 수 있다. 전쟁은 먹는 일, 마시는 일, 혹은 어떤 다른 일처럼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정당한 전쟁을 승인했다.

물론 정당한 전쟁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따른다. 첫째로 정당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은 정의를 수호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정당한 주체가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개인이 아니라 통치권을 위임받은 국가만이 전쟁에 나설 수 있다. 셋째로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이다. 넷째로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수행돼야 한다. 불필요한 폭력, 약탈, 학살, 방화, 잔학행위는 금지돼야 한다. 다섯째로 성공 가능성이 분명해야 한다. 전쟁으로 인한 실보다는 득이 월등히 커야만 한다. 여섯째로 성직자나 수도사 등 종교인은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전제조건을 두기는 했지만 전쟁이 일단 승인되자 인간은 전쟁을 남용하는 죄를 짓기 시작했다.

#십자군

교회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가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 아래 감행된 이 전쟁은 1096년 1차 원정부터 1291년 8차 원정까지 근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긴 기간 중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한 것은 1차와 6차 원정 때 잠시뿐이었고, 대부분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4차 원정 때는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학살과 노략질을 자행함으로써 동방과 서방 교회 사이에 지금껏 가시지 않는 적대감을 만들었고, 원정 중에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자행함으로써 이후 유럽역사에서 이 망령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의 근본적인 적대감을 형성하고 말았다. 십자군 이념은 정당전쟁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십자군은 인간적인 목적이 아닌 신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며, 국가가 아니라 영적 지도자가 시작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십자군 이념에 의해 전쟁이 수행될 때에는 정당전쟁의 전제조건들이 모두 무력해지고 훨씬 더 비인간적 진멸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과연 십자가와 전쟁이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을 독려했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거룩한 전쟁' 혹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가? 어떻게 거룩한 전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디에 정당한 전쟁이 있단 말인가? 일찍이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달콤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쟁은 멀리 떨어져서 말로만 싸우는 몇몇 사람의 욕심은 만족시킬지 모르지만,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불행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원자력과 핵을 들먹이는 오늘날 전쟁은 공멸일 수밖에 없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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