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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2월 12~17일

기사승인 [3127호] 2018.02.09  09: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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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국시민
본문 : 마 5:13~20
찬송 : 204장

어떻게 해야 천국 시민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까? 주님께서 주신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 시민의 기준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 믿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주 예수께서 나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것,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면 믿는 것인가?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하면 믿는 것인가? 그렇게만 하면 천국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준은 채우는 것인가?
핵심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일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어떤 의인가로 전환되게 된다. 무엇일까? 그들보다 더 나은 의가?
산상수훈은 '천국 시민의 대헌장'이라는 별칭을 가진다. 천국 시민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에 대단히 중요한 가치인 사람들, 이렇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천국 시민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산상 수훈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씀은 여덟 가지의 복에 관한 말씀일 것이다. 또한 그와 함께 잘 알려진 말씀,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도 있다. 이 말씀들은 천국 시민이 마땅히 이렇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하는 말씀들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의 내용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의미를 잠시 새겨 보도록 하자.
소금이 무엇인가? 핵심은 그 맛에 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간이 맞게 된다는 속담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소금이 짠 맛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음식으로 투여되어 녹아져야 한다는 것. 무엇이 천국시민의 의인가? 맛이 있어야 하고, 가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이다. 또한 녹아져 음식물 사이로 스며들어야 한다. 짠 맛을 상실하면 쓸 데 없고, 맛은 간직하고 있으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으면 쓸모 없고, 또 음식 가운데로 던져졌으나 녹지 않고 버티고 있다면, 역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금은 맛도 있고, 경우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빛은 밝혀야 한다. 등불은 불을 붙일 수 있도록 기름이 채워져 있어야 하고, 그 기름을 태워야 하고, 또 있어야 할 자리, 곧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천국시민의 의란 무엇인가? 소금과 빛의 이야기로 본다면,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수행하며, 꼭 필요한 자리에 가서 자신을 던지는 것, 헌신과 충성, 그것이 천국 시민의 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어떤 것인가? 그들은 철저했을지 모르나 맛도 없고, 어둠을 밝히지도 못했다. 맛있는 성도, 밝히는 성도의 삶, 그것이 천국 시민의 의일 것이다.

오늘의 기도
천국 시민으로서 시민증을 받았으니 시민증에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수 목사
예천교회


화-새 사람을 입으라
본문 : 엡 4:17~24
찬송 : 452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방인으로 살던 때처럼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라고 권면한다. 구원을 얻기 전에 에베소 성도들은 다른 이방인들처럼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했는데, 바울이 편지를 쓰는 그 당시까지도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이 이전에 이방인으로 살았을 때의 삶을 상기시키면서 이제부터는 그러한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옛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에게 합당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 바울은 본문 21절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했다. 이 말씀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21절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워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둘째,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 본문 2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 과거의 삶의 방식이나 거짓된 욕심을 좇는 옛 사람과 단호히 결별하고, 하나님을 따라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또 세상과는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셋째, 심령이 새롭게 됨을 받아야 한다. 본문 23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했다. 그런데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골 1:13, 고후 5:17). 그러므로 심령이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하고, 진리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죄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이며, 심령이 새롭게 됨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리도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배워서, 죄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됨을 받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여 옛 사람의 소욕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경희 목사
백향목교회


수-선행조건
본문 : 수 5:1~12
찬송 : 379장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크고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장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건강의 문제가 올무가 되고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가 태산처럼 가로막기도 한다. 더러는 사업이나 직장문제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모두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꽃길이 아니라 도처에 장애물이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여리고성을 어떻게 허물어야 하는가?
먼저 언약을 표징이 있어야 한다. 본문 2~3절을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고 했다. 정황적으로는 녹슨 병장기를 손질하고 전투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을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구별된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징이다. 따라서 약속의 땅은 언약의 표징이 있는 사람들이 차지할 수 있다. 또한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본문 8절을 보면 또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러 낫기를 기다릴 때라고 했다. 적들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다. 상대편에서 보면 얼마나 공격하기에 좋은 기회인가? 할례를 받고 누워서 적군을 쳐다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상황에서 믿을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를 부인해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내 생각과 방법과 계획이 죽어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더라고 했다. 유월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하심에 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먹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승리의 보증이요 약속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았지만 이미 승리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행조건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이시다.

오늘의 기도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험하고 고난과 장벽이 가로막더라도 승리의 보증이요 약속이 되시는 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호민 목사
산정현교회


목-삶이 힘들 때, 누구를 의지하나?
본문 : 시 18:1~10
찬송 : 93장

'3포 세대'를 넘어 '5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마련 포기)' 여기에 희망과 꿈까지 포기하는 '7포 세대'라는 말은 불과 2~3년 전 귀가 닮도록 들어왔던 말들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가? 특별히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윗의 인생은 늘 위기였다. 그의 장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블레셋의 위협이 늘 있었다. 아말렉과 모압의 침공, 암몬과 가나안의 침공이 있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있었다. 부하의 반역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의 잘못으로 당하는 죄의 보응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위기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모델로 떠오른 인물이 되었다. 시편 18편은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부터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세우기까지 굴곡 많은 인생을 겪었던 다윗이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시이다.
1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노래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라캄'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오직 이 구절에만 사용되어진 단어로 그야말로 녹아진 사랑, 자신을 도우시고 수많은 대적에게서 승리하게 하시고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뼛속까지 사무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은 17절에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다"고 했다. 다윗은 그의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경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사랑한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하고 찬양한다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믿음이다. 1절 하반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믿는 신앙이 있었다. 둘째는 기도이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아뢰며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다. 셋째는 말씀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다윗이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계신다. 임마누엘 주님으로 오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의지할 이 예수님 밖에 없다.

오늘의 기도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주님을 의지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에게 힘과 위로함이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현구 목사
대야제일교회


금-하나님 아버지께는 상관 있다
본문 : 창 30:32~43
찬송 : 304장

오늘은 가난과 억울함에서부터 말씀이 시작된다. 야곱은 열심히 일했지만 라반은 야곱과의 품삯을 열 번이나 속였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과 직접 싸우지 않았다. 대신 자기 뒤에서 일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양이든 염소이든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색만 야곱 자신의 것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계산이 빠른 라반은 야곱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한다. 그는 자신의 양 무리 중에서 검은 것과 얼룩진 것은 모두 골라내어 자기 아들들이 치게 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가야 하는 거리를 두고, 야곱에게는 오직 하얀색 양들과 염소들만을 치게 했다. 그러니 야곱이 이런 환경과 조건에서 점이 있고, 아롱지고, 검은 색의 양과 염소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야곱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까지는 잘 안되었어도 하나님께서 보시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을 믿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야곱과 같은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부자가 되고 싶으면 새벽에 나가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새벽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더 상식적이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자녀들이 잘되는 것과 길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마치 나뭇가지를 알록달록 만들어 놓고 하얀 양들 사이에서 아롱진 새끼 양을 얻겠다는 것과 똑같다. 상식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내 자식 잘되는 것과 길거리에 서서 전도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상관이 있다.
믿음으로 소원을 심어 본 사람들은 야곱의 마음을 알 것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상식적으로 따지고 싸우지 않았다. 그 대신 야곱은 자신의 모든 마음, 자신의 모든 불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일을 했다. '하나님, 아시지요? 제가 참은 것, 제가 양보한 것, 제가 아무소리 안하고 바보같이 가만히 있었던 것,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 아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게 갚아 주시옵소서'라는 야곱의 기도가 바로 우리들의 기도인 것이다.
흰 색 양떼들 속에서 얼룩무늬 양이 한 두 마리 태어났다면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두 마리가 아니다. 수 백마리의 얼룩무늬 양과 검은색 양이 태어났다. 그야말로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축복주실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상황과 소원이 전혀 상관없어 보여도 괜찮다. 하나님께는 다 상관이 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건강하고도 상관 있고, 물질하고도 상관 있고, 직장하고도 상관 있고, 자녀의 앞길 하고도 상관 있음을 믿자.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셔서 날마다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우리를 섭섭하게 해도 그 사람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상급을 기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광용 목사
포항믿음교회


토-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여인
본문 : 마 9:20~22
찬송 : 361장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기만 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뒤로 와서 겉옷을 만졌더니 나았다. 치유 받은 사실과 더불어 그 믿음도 대단하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데는 많은 금기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겉옷은 매우 중요하다. 겉옷은 입는 옷이라기보다는 덮는 옷이고, 기도할 때 입은 옷이고, 계명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사회적 권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옷단 술에는 하나님의 색을 나타내는 청색 실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겉옷의 네 귀에 달린 '술'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그 옷은 귀중하고, 특별한 옷이다. 옷단 술 네 개 중 하나만 손상되어도 나머지 술을 다시 달아야 했다.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옷단 술을 길게 하고 다녔다. 그것이 이른바 긴 옷이다. 그 옷단 술을 손상시키는 것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겉옷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직계 자녀들뿐이고, 허락 없이 겉옷을 만진 사람은 겉옷이 주인이 내리는 벌을 발아야 했다.
더군다나 겉옷을 만진 여인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다. 피의 유출이 있는 여인은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것(사람과 물건)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다는 것은 처벌을 각오한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여인이 그렇게 한 것은 온전하지 못한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낫는다(1세기 랍비 문헌에도 있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도 많은 무리를 뚫고 나와야 했고, 그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과 접촉하게 되어 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몰래 예수님의 뒤로 접근하여 겉옷을 만지는 순간 여인은 자신의 혈루 근원이 마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신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모든 군중들의 눈길이 예수님의 입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여인은 허락도 없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짐으로 권위를 손상시켰기에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는 순간 처벌에서 면제되었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심으로 더 이상 여인은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예수님은 범죄 한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자녀라 부르시고, 영원한 천국의 식탁에 가족으로 초대하신 분이시다. 우리에게는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고, 적극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담대한 마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허강대 목사
단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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